04. 빼앗겼다는 그런 심정은 아니다.

<즐겁게 살자, 걱정하지 말고>

by 더굿북

아사가야의 아파트로 돌아오자, 이쿠코는 먼저 커튼을 치고 난방을 켰다. 그리고 코트와 장갑을 벗고 양말을 벗었다. 손을 씻고 양치질을 한다. 세면실 벽에는 성모마리아와 어린 예수 그림이 붙어 있다. 친구가 해외여행 기념으로 사다준 것이다. 종이도 인쇄 상태도 조잡하지만, 이쿠코는 이 그림을 좋아한다. 이 그림을 보면 집에 돌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코 언니는 참 좋은 사람이야.

이쿠코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쿠코에게 사람은 모두 —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 좋은 사람과 좋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왜 이렇게 머리가 푸석푸석하니, 하면서 머리카락을 빗어준 하루코의 차가운 손가락을 떠올린다. 그녀가 애용하는 향수의 정겨운 냄새가 났다.

우리 하루코였는데, 지금은 구마키 씨의 여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구마키 씨에게 빼앗겼다는 그런 심정은 아니다. 뭐랄까, 예를 들면 운동회 날 아주 어린 자식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에 가깝다. 그 생각이 우스워 혼자 웃으면서 좀 취했나 보다고 생각한 이쿠코는 잠옷으로 옷을 갈아입고 자동응답기의 메시지와 메일을 체크했다.

그리고 초등학생 시절부터 습관적으로 쓰고 있는 일기를 쓴다. 이쿠코의 일기는 다분히 심오하다. 그날 있었던 일뿐만 아니라, 그때 생각을 쓰기 때문에 그렇게 되고 만다. 사람은 왜 공부를 하는 걸까, 어떻게 해서 사랑에 빠지는 걸까, 그런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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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날 이쿠코가 침대에 들어간 시간은 새벽 두 시였다.

빛.

컵에 담긴 물 너머로 보는 겨울 햇살은 세상 일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질 만큼 아름답다, 하고 아사코는 생각한다.

빛.

물에 갇힌 그것은 방 안에 넘실거리는 빛보다 고요하다.

오후. 알루미늄 새시 창틀 너머에 있는 마당은 흙이 하얗게 말랐다. 동백나무 이파리의 어두운 초록.

아사코는 이마를 유리창에 댄다. 그리고 왼쪽 볼을. 지그시, 그러나 쉼 없이 아픔을 주장하는 볼. 스웨터에 청바지 차림인 아사코는 오른손에는 물컵을 왼손에는 알약을 쥔 채, 아까부터 창가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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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참 좋네.

아사코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요즘 문득문득 이렇게 속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는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11월의 수요일 한낮.

참, 시장에 다녀와야지. 세탁용 세제가 거의 떨어져간다. 홍차에 넣을 각설탕도.

아사코는 왼손에 쥔 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 아사코는 그 약을 친근하게 느낀다. 친근하게, 거의 인생의 동반자처럼 — 물과 함께 전부 꿀꺽 삼켰다. 하얗고 커다란 알약 하나와 하얗고 조그만 알약이 두 개, 엷고 예쁜 분홍색 아주 작은 알약도 두 개.

그래, 오늘 저녁에는 양배추 롤을 해야겠네, 하고 생각한다. 법랑 냄비에 찌는 것도 즐겁고 맛나는 냄새가 집 안에 가득해진다.

아사코는 눈을 감고 온몸에 행복이 차오르기를 기다렸다. 천천히, 조금씩, 행복은 아사코의 몸에 퍼진다.

빛.

눈을 가늘게 찌푸리자, 이파리의 초록이 번져 크기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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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외의 집에서 아사코가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마당이 내다보이는 여기, 다다미방이다. 큰마음 먹고 산 이 씨 조선시대의 부조 조각상이 하나 놓여 있고, 다다미는 매일 걸레로 닦아 시원하고 깨끗하다.

장바구니를 들고 운전용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간다. 대형 쇼핑몰까지는 자동차로 15분 거리다.

이쿠코가 다니는 직장의 유니폼은 칙칙한 분홍색이다. 규칙상 하얀 블라우스와 함께 입어야 한다. 널찍한 로비는 밝고 늘 사람으로 웅성거린다. 학생이 많지만, 아줌마와 아저씨도 있다. 간혹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온다.

이곳에서 이쿠코가 하는 일은 신규 등록자를 접수하는 것이다. 나이나 직업과 무관하게 여기 손님은 모두 ‘학생’이라 불린다.

운전면허학원의 사무원 일은 전문학교의 게시판에서 찾았다. 패션과 디자인 관련 학교의 게시판에 대체 왜? 한 번 그런 생각이 들자 이쿠코는 그 전단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렇게 이쿠코는 지금 여기 있다.

“안녕.”

목소리가 들려 얼굴을 드니, 헬멧을 손에 든 남자가 서 있었다. 고개만 쏙 내밀고 인사라고도 할 수 없는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아, 귀찮게, 하고 이쿠코는 생각했다. 벨이 좀 빨리 안 울리나, 하고.

남자는 그제 밤 일에 대해서,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취했나 봐요. 왜 그렇게 취한 건지.”

그야 주량보다 많이 마셨으니 그렇겠지,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때도 이쿠코는 늘 그렇게 하듯 머릿속에서 이 사람은 나쁜 짓을 한 게 아니니까 잘해줘야 한다는 자기 명령을 내린다. 또 솔직함이 최고의 예의라고 생각하는 탓에 업무용 말투로 이렇게 말한다.

“신경 쓸 거 없어요.”

그리고 미소 지으면서,

“난, 관찰도 했고”

하고 덧붙이고,

“또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는,

“뭐 하게?”

라고 되물어, 대화가 지리멸렬해지고 말았다.

“곧 벨이 울릴 거야.”

이쿠코는 웃는 얼굴로 남자를 쫓고는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륜차 운전을 배우는 이 남자와 그제로 네 번째 데이트를 했다. 두 번째 데이트에서 처음 잤다. 장소는 호텔이었다.

이쿠코는 언니들에 비해, 또는 또래 여자 친구들에 비해 육체관계를 가진 남자의 수가 상당히 많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상당히 많지만 조금도 발전하지 않는다. 언젠가 언니들에게 의논한 적도 있었다. 언니들은 어떻게 하는데? 하고. 어떻게 하면 능숙해질 수 있어?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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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쿠코가 고등학생 때 일이다.

언니 둘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그다음에는 웃고 각자 구체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이쿠코는 그 조언 하나하나를 충실하게 지켰다. 늘.

벨이 울렸다. 교관들은 선반에서 파일을 집어 들고 모두 코스로 나간다. 빨간 차(오토 차)와 하얀 차(수동 차), 그리고 이륜차가 졸린 곤충처럼 햇살 아래 줄지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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