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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Apr 24. 2018

05. 선택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마지막 회)

<생리 공감>



내 몸을 위한 선택들
  
2016년 여름,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다른 프로젝트의 촬영을 위해 뉴욕에 갔다. 마침 뉴욕에서는 무상 생리대가 핫한 이슈였고 뉴욕시에서 조만간 무상 생리대 법안이 통과될 예정이었다. 뉴욕에 간 김에 그 법안을 담당했던 사람들도 꼭 만나고 싶었다. 촬영이 끝난 후 나는 프로젝트팀에 양해를 구하고 이틀 동안 뉴욕에 더 남기로 했다. 따로 계획은 없었다. 해당 법안을 만든 시의원과 운동가들에게 인터뷰 요청 메일을 보냈지만 답은 받지 못한 상태였다. 다행히 촬영이 끝나갈 무렵 법안 발의가 되기 전부터 무상 생리대 운동을 이끌어 온 페미니스트 활동가 제니퍼 와이즈 올프(Jennifer Weiss-Wolf)에게서 답이왔다. 7월 13일 오전 9시까지 자신의 사무실로 오면 1시간 정도 시간을 내주겠다는 것이었다.
  
오, 신이시여. 그날은 촬영의 모든 일정이 끝나는 바로 다음 날이었다! 촬영팀을 모두 떠나보낸 뒤 나와 촬영감독은 맨해튼 한복판에 있는 YMCA에 짐을 부렸다. 이층 침대와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통로가 있는 하룻밤에 7만 원짜리 방이었다. 다음 날 제니퍼가 있는 뉴욕대 로스쿨 건물로 갔다. 내가 왜 지구 반대편에 있는 뉴욕까지 와서 그녀를 만나고 싶어 했는지 이유를 들은 제니퍼가 말했다.
  
“너 오늘… 잭팟 터진 것 같다.”
  
제니퍼의 말을 듣기 전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그날이 바로 뉴욕시에서 무상 생리대 법안 통과를 기념하는 행사를 여는 날이었다. 뉴욕의 한 고등학교에서 법안을 발의한 모든 관계자가 모여 법안을 발표하고,시장을 비롯한 입법자들이 법안에 사인을 하는 기념행사가 있을 예정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내 심장은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용기를 내어 애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 좀 데려가 줄 수 있어?”
  
물론이지. 제니퍼는 바로 주최 측에 연락을 했다. 내가 제니퍼 쪽 취재 담당자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준 것이다.
  
  
우연한 깨달음
  
기념식까지 시간이 떠 나와 촬영팀은 장비를 챙겨 근처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테이크아웃 전문점(?)인지 매장 내 자리가 턱없이 부족했다. 할 수 없이 여러 명이 앉는 큰 테이블에 앉아 있던 노부부에게 양해를 구하고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아침부터 굶은 탓에 샌드위치와 커피를 시킨 뒤 자리에 앉았다. 그때 벤티 사이즈의 커피를 마시고 있던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커피를 한 잔 내밀었다. 아내분이 커피 시킨 것을 모르고 또 한 잔을 시켜 남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맙다고 말한 뒤 커피를 받았다. 할아버지는 커피를 주고 나서도 힐끔힐끔 우리를 쳐다봤다. 장비를 잔뜩 부려 놓고 앉아 있는 우리에게 호기심이 생긴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걸어왔다.
  
“촬영팀이세요?”
  
우리는 그렇다고 했다. 나도 그런 할아버지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혹시 이번에 뉴욕시에서 운영하는 공립학교와 노숙인 보호소, 시립교도소에 생리대를 무상으로 공급하는 법안이 통과된 것을 아느냐고 물어봤다.
  
“그거 굉장한 소식인데요?!”
  
할아버지는 정말 기쁜 표정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자신은 시카고 사람이고 잠깐 뉴욕에 들러 그런 일이 있는 줄 몰랐지만 정말 좋은 법안이라고 극찬했다. 곧바로 할아버지가 마음에 든 나는 우리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국에서 왔는데… 블라블라… 생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고… 블라블라… 내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할아버지가 곧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거 알아요? 재밌네요. 나도 산부인과 의사거든요.”
  
에? 할아버지는 주머니에서 의사 면허증을 꺼내 보이면서 자신이 산부인과 전문의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우리 옆에서 옆 테이블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아내분이(이 부부는 카페에서 젊은 사람들과 대화 나누는 게 취미인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우리 쪽을 돌아보며 자신이 보증한다고 말해 주었다.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산부인과 전문의. 그는 생리를 할지 말지는 여성이 선택할 문제라고 했다.

우리는 궁금한 게 너무너무 많았다! 할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한 뒤 카메라를 설치했다. 탐폰, 생리컵, 피임약…. 우리 질문에 할아버지는 신중하고 쉬운 언어로 답해 주었다. 마지막 질문을 할 시간이 되었다.
  
“생리를 안 해도 괜찮을까요? 그게 선택지가 될 수 있을까요?”
  
할아버지는 말했다.

생리를 안 할 수 있습니다. 약을 먹을 수도 있고, 호르몬 주사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비타민제 처방으로 생리 양을 줄여나갈 수도 있습니다. IUD나 임플라논 같은 기구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생리를 하지 않는 것과 건강은 연관성이 없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필요에 따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촬영된 영상은 쓸 수 없었다. 스타벅스 내부가 너무 시끄러웠고 워낙 갑작스럽게 진행된 촬영이라 중간에 카메라 배터리가 나가는 바람에 대화 내용 중 일부가 빠지기도 했다. 촬영분을 돌려 보다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나와 촬영감독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감동’을 받았다. 맺힌 무언가가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지 모른다. 선택할 수 있다. 누구나 자기 몸과 필요에 맞춰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선택할 수 있으려면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무엇인지 알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선택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가장 기본적인 필요조건이 충족되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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