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의 질문법>
몇 년 전 아버지 제사에 맞춰 대전 현충원에 간 적이 있다. 아버지는 5월 중순 부처님 오신 날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늘 즈음해서 현충원에 간다. 그때는 황금 연휴라 방문객이 많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어머니가 “길이 막혀도 다들 다닌다. 그냥 가자”고 강하게 주장을 하셔서 어쩔 수 없었다.
일요일 이른 시간에 출발했는데 고속도로 입구에서부터 꽉 막혔다. 뭔가 불길했다. 교통 정보를 보니 수십 킬로미터가 이미 정체 중이고 나아질 가능성도 없었다. 현충원에서 다른 가족들과 10시쯤 만나기로 했는데, 대구에서 올라오는 누님만 제시간에 도착했다. 난 두 시간쯤 늦고, 동생은 나름 빠른 길을 찾는다고 하다가 나보다 한 시간이 더 걸렸다. 모든 일정이 엉망이 되었고 온몸이 파김치가 된 채 서울로 돌아왔다.
나는 교통 체증을 병적으로 싫어해서 차 막히는 때에 어딜 가는 걸 몹시 꺼린다. 평소 어머니는 그런 나를 못마땅해하며 “남들도 다 그러면서 다니는데 넌 어째 그렇게 유난을 떠니. 길막히는 거 싫어하면 한국에선 살 수 없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이날 사건 이후 어머니도 달라지셨다. 본인이 직접 겪어보니 장난이 아니라고 판단된 것이다.
8월 초는 전국적인 휴가 시즌이다. 꽤 많은 기업이 그때를 전후해 휴가를 간다. 대기업 공장들이 가동을 중단하면서, 거기에 맞춰 관련 업체 사람들과 또 그 업체들과 연결된 사람들까지 연쇄적으로 일을 쉬게 된다. 대기업을 다니던 시절에는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때 놀아야만 했다. 난 그게 참 싫었다.
나는 태생적으로 청개구리 기질이 있는 것 같다. 남들이 다하는 건 이상하게 하기 싫고, 남들이 다 열광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는다. 남들이 놀러 갈 때는 가지 않고, 남들이 놀러 갈 생각을 하지 않을 때 놀러 가는 걸 좋아한다. 경영에서는 차별화가 참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막상 자신의 삶에서는 차별화를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난 남들과 다른 게 좋다. 남들과 다르게 살고 싶다. 그래야 재미있고 삶의 질도 올라간다.
지금도 그런 식으로 살고 있다. 남들이 출근할 때 퇴근하고, 남들이 일할 때 쉬고 남들이 쉴 때 일한다. 남들이 다 보는 영화는 보기 싫고, 남들이 안 보는 영화는 보고 싶다. 심지어 2002년 한일 월드컵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내가 경기를 보면 응원하는 팀이 진다는 징크스가 첫째 이유였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두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본다고 이기는 것도 아닌데 나까지 보탤 것은 없다는 생각에 그 시간에 책을 읽고 싶었다. 생각도 그렇다. 남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늘 의문을 품는다.
강의를 할 때는 특히 차별화가 중요하다.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해야 호소력이 높아진다. 남들도 다 아는 사실, 너도 동의하고 나도 동의하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뻔한 이야기를 해서는 청중을 흔들어놓을 수 없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통념에 저항하는 생각을 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강의 중에 자주 던지는 질문이 있다. “일을 열심히 했을 때 오는 가장 큰 보상은 뭘까요?” 그럼 돈, 자아 성취, 칭찬, 인센티브 같은 답변이 나온다. 이때 되묻는다. “제가 이런 답변을 원했을까요?” 다들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본다. 난 태연하게 이야기한다. “일을 열심히 했을 때 오는 가장 큰 보상은 또 다른 일입니다. 계속 일이 몰립니다.” 다들 뒤집어진다. 예상 못한 답이지만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어 나는 이야기한다. “생각해보세요. 직원 중 어느 직원에게 일을 시킬까요? 허술하고 맨날 뭔가 빼먹는 직원에게는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딱 부러지고 확실한 직원에게 일을 줍니다. 그럼 당연히 한 사람은 바쁘고 다른 한 사람은 한가합니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나요? 단기적으로 그럴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일 많은 사람이 유리합니다. 일을 하면서 일하는 방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나는 질문을 떠올릴 때 곧바로 떠오르는 답변과 더불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답변으로는 무엇이 있을까를 함께 생각하곤 한다.
좋은 질문 중 하나는 통념에 저항하는 질문이다. 남들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물음표를 붙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공자는 나이 마흔을 ‘불혹不惑’, 쉰을 ‘지천명知天命’, 예순을 ‘이순耳順’이라고 했다. 마흔이 되면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쉰에는 하늘의 뜻을 알고, 예순에는 무슨 말을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난 이 말 안에 역설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떻게 마흔이 된다고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는가? 불혹이란 마흔이 가장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시기이니 더욱 조심하란 말이 아닐까? 마찬가지다. 쉰이 되도 하늘의 뜻은 절대 알 수 없고, 나이가 들수록 남의 말이 귀에 거슬리니 그 점을 늘 경계하라는 뜻에서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 정답이 있을 수는 없고 순전히 내 생각이다.
내가 자주 생각하는 통념에 저항하는 질문 몇 가지를 더 소개한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절대 그렇지 않다. 싸우면 상처가 날 뿐이다. 부부싸움도 가능한 한 하지 않는 게 좋다. 난 평생 부부싸움을 한 적이 없다. 그래도 35년간 잘 살고 있다. 통일 문제도 그렇다. 퀘벡, 스코틀랜드, 카탈루냐 등 다른 나라들은 다들 독립을 하려고 난리인데 우리는 왜 통일을 하려고 할까? 통일이 그렇게 필요할까? 통일을 해서 얻는 건 무엇이고 잃는 건 무엇일까?
혁신은 통념의 저항에서 나온다. 남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의심을 품고 그에 대한 질문을 할 때 나온다. 여러분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에 의문을 갖고 질문을 해보라. 새로운 세상이 열릴지 누가 아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