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서, 조선을 말하다>
조선의 괴멸적 패배
1592년(선조 25) 4월 13일, 긴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부산 다대포 동북쪽 두송산 응봉 봉수대에서 적선의 출현을 알리는 최초의 봉수가 오르며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당시에 보고된 내용은 “약 90여 척의 왜선이 추이도 남쪽에서 부산포를 향해 항해 중이다”라는 것이었다. 조선은 삼포왜란을 비롯해 왜구의 잦은 출몰을 겪어왔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국지전으로 파악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임진왜란 중 부산진에 공격해 들어오는 왜군을 묘사한 <임진전란도>
개전 하루 만에 부산진의 정발(鄭撥)이 패전하고 이튿날 동래성이 함락되었다. 당시 조선군은 보병에 북방 세력 견제를 위해 훈련된 기병 중심으로 짜인 오위 편제가 중심이었고, 여기에 활과 총통 등 원거리 무기약간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16세기 중엽 포르투갈에서 수입한 조총을 개인 무기로 보급했다. 창검으로 구성된 기존의 단병접전 기법에 조총을 더해 한층 복합적인 전술을 운용했다.
일본군의 새로운 전법에 무력했던 조선군
당시 일본군의 핵심 전술은 아직 조선에 보급되지 않은 조총 부대를 선두에 세우고 선제 사격을 가한 뒤, 창과 검을 든 살수들이 달려들어 단병접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일본군의 조총 발사 후 창검으로 격돌하는 보병 위주 전술은 조선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명나라 조승훈의 기병 부대 역시 이러한 전술을 극복하지 못하고 하루 만에 본국으로 패퇴했다. 탄금대 전투 이후 도성이 함락되고 명나라의 1차 원군이 패퇴한 뒤 최초로 전술적 한계를 극복한 것은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 전투였다.
평양성을 조명연합군이 합동으로 탈환하는 모습을 담은 <임란전승평양입성도병>
2차 원군으로 온 이여송은 근접전에 능한 절강보병(浙江步兵)을 동원해 일본군의 전술을 극복했다. 명군은 강력한 화포와 단병접전에 능한 절강보병으로 평양성을 수복했다. 하지만 적과 교전에서 칼날에 맞아 죽은 자가 1,000명이나 된다고 할 정도로 왜검은 명군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조선은 일본과 명나라의 단병 무예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항왜에게 검술 교관 자리를 맡겨 조선군에게 왜검법을 직접 가르치도록 했다.
중국의 이순신, 척계광
명나라의 새로운 절강병법(浙江兵法)을 익히기 위해 1598년(선조 31) 훈련도감 낭청 한교(韓嶠)를 중심으로 명나라의 병법서인 『기효신서』에 수록된 무예 중 근접 거리에서 교전을 펼칠 수 있는 6가지를 뽑아 정리해 『무예제보』를 편찬했다. 『기효신서』는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쓴 병서로, 왜구에 우세했던 절강병법의 요체가 담긴 군사 서적이다.
척계광은 우리나라의 이순신에 비견될 정도로 중국에서 추앙받는 명장이다. 당시 명나라는 해안을 중심으로 왜구의 침입이 극심해지자, 척계광을 저장(浙江, 절강)으로 발령해 군무를 관할하게 했다. 그러나 척계광이 저장 지역에 부임한 후 군대의 상태를 점검하니 상황이 말이 아니었다.
척계광은 새로 부임한 지역을 꼼꼼하게 살펴 주변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무기를 만들고, 인근 농민을 규합해 새로운 형태의 군대를 조직했다. 저장 지역은 강수량이 많고 기온이 높아 평지는 대부분 논이고, 산에는 등나무와 대나무가 잘 자랐다. 척계광은 인근 산에서 등나무를 채취해서 다듬은 후 여러 번 찌고 말린 뒤 표면에 기름을 발라 칼날에 쉽게 베이지 않는 방패를 만들어 등패라 불렀다. 대나무는 가지를 모두 떼어내고 날카로운 창날을 붙여 긴 죽창 형태로 만들었다. 가지가 튼실한 대나무는 가지를 그대로 두고 가지 끝에 작은 철 조각 여러 개를 달고 독을 묻혀 일종의 휴대용 철조망을 만들었다. 이는 낭선이라고 한다. 또한 농민들이 풀 더미나 두엄을 옮길 때 사용하는 가지가 3개 달린 농기구를 전투에 활용할 수 있게 발전시켜 당파를 만들었다.
당시 일본군의 칼은 일반적인 전투용 칼보다 길어 명군이 대적하기 어려웠는데, 척계광은 일본군이 사용하는 왜검보다 길고 무거운 장도를 만들었다. 장도는 두 손으로 잡고 써야 해서 쌍수도라 불렸다. 척계광은 이렇게 큰 비용 없이 무기를 확충하고 농민군의 특성을 살린 소규모 부대 단위 전술을 만들었다.
조선군이 활용한 현장 중심 전술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은 명군이 사용한 당파나 낭선을 보고 의심을 넘어 비웃기까지 했다. 그러나 평양성 탈환 전투에서 일본군을 제압하는 것을 보고 명군의 무예를 인정하게 되었다. 『무예제보』에 실린 6가지 무예는 곤방·등패·낭선·장창·당파·장도로, 일본군의 단병접전을 방어하고 공격하는 데 효과적인 무예들이다.
낭선은 등패와, 당파는 장창과 짝을 이루어 신속히 공격과 방어를 펼칠 수 있도록 배치되었다. 이와 같이 긴 무기와 짧은 무기를 적절히 배치해 장이위단(長以衛短, 긴 무기로 짧은 것을 지킨다), 단이구장(短以救長, 짧은 무기로 긴 것을 구한다)을 이루었다. 이렇게 장단이 조화롭게 배치된 소규모 부대를 배치한 것이 원앙진법인데,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 탈환 전투에서도 원앙진법으로 일본군을 제압했다. 『무예제보』에는 이 원앙진법을 운용할 때 필요한 무예 6가지가 정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