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함께 살아지다>
불안은 삶의 ‘배려’가 무너질 때 다가오는 정서이다. 타성으로나마 내게 익숙해져 있는 삶의 결에서 벗어난, 혹은 내가 믿어왔던 방법론으로 해결되지 않는 곤욕스러운 상황 앞에서, 우리는 자기존재감의 상실을 겪는다.
요즘의 청춘들이 취업난 속에서 느끼는 ‘내가 이것밖에 안 되나?’ 싶은 좌절감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가 어려서부터 부모님께는 특별한 존재로서 사랑을 받아온 터라, 이 극강의 좌절감을 느낄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지켜왔던 삶의 가치들이 無가 된다. 관성이라는 것은, 그것이 비록 타성일망정, 내가 견지하며 살아온 시간의 결이다. 내게 익숙한 결에서 빗겨서는 순간에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삶을 지탱하던 의미들이 제자리를 잃어버린다.
역설은 자기존재감을 상실하는 순간에 비로소 그 존재감을 자각한다는 사실이다. 정작 있을 때는 신경도 쓰지 않다가, 그것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그것이 거기 있었음을 절실히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불안의 상황 안으로 내던져진 후에야 그전까지 한 번도 점쳐보지 않았던 새로운 가능성들에 도전하게 된다. 내가 지켜온 관성 안에서는 굳이 저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지금 그 관성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굳이 저렇게까지 해봐야 하는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불안으로 인해 경험과 지평의 스펙트럼이 확장되는 것. 그렇듯 무너진 관성 앞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발견된다.
수험생들에게 시험은 불안이다. 그 시험 자체에 대한 불안이라기보다는, 시험의 결과가 자신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불안이다. 면접장 앞에서 맞닥뜨리는 취준생의 불안도 마찬가지이다. 머릿속에 되뇌는 모범답안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가 알 수 없어 불안인 것이다. 시험결과와 면접결과, 혹은 저 골목길 돌아에 나타날 무언가를 미리 알 수 있다면, 그 상황이 불안일 리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미리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과연 행복할까?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가장 불행한 이는 예언자였다. 이미 정해진 미래를 알고 있는 마당에, 다른 가능성을 점쳐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경우는 되레 모든 미래를 알고 있는 이였다. 그 정도의 긴장감은 가지고 살아야 역동적일 수도 있는 삶이다. 어린 시절의 가을운동회에서 단거리 달리기를 앞두고 느꼈던, 혹여나 1등을 놓치면 어떡하나 싶은 걱정으로 두근거리던 그 긴장감에 빗댈 수 있을까? 달리기에 소질이 없는 친구는 이런 불안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니 불안을 느끼지 않는 평온함도, 그 삶의 태도를 되돌아볼 필요는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불안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다. 생태계의 데이터가 전무했을 태초의 인류에게 낯선 상황과 대상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일단 경계를 하고 볼 문제였다. 가령 사냥감을 쫓다가 뜻하지 않게 들어서게 된 낯선 장소 혹은 그곳에서 처음 마주치는 낯선 종족들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를 아직 알 수 없기에 일단 불안을 느끼고 보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던 것이다.
계통의 발생은 개체의 발생으로 이어지는 법, 융의 키워드를 빌리자면 불안은 인류에게 전승되고 있는 집단무의식이기도 하다. 본능에서 비롯되는 성질인 터라, 불안은 극복되는 성질도 아니거니와 극복이 되어서도 안 되는 문제이다. 그것을 극복할 확실한 방법론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불안인 것이고, 그 적정의 긴장감이 필요한 삶이기도 하다. 불안해해도 된다. 아니 불안해야 한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불안도를 다소 낮추어보는 위안, 철학이 건네는 위로는 그것이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