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스 프롬 파리>
건물의 지붕이며 벽면, 자동차와 버스, 거리와 횡단보도가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런던은 초봄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미아는 에이전트를 만나러 나갔다.
미아의 에이전트인 크레스턴은 보수적인 남자라서, 늘 사실 그대로를 말하지만 표현에 품위가 있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자주 사람들 입에 오를지언정, 특유의 품격 있는 화술 덕분에 크레스턴의 지적은 신랄하지만 절대 모욕적이지 않다는 평판을 듣고 있다. 이런 에이전트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미아는 험한 말과 비정함이 난무하는 영화계에서 온갖 특권을 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날, 크레스턴은 미아의 새 영화 비공개 시사회에 가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크레스턴이 동행을 금했기 때문에 미아는 그의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크레스턴은 레인코트를 벗어놓은 다음 안락의자에 앉아 뜸들이지 않고 딱 잘라 말했다.
“액션, 약간의 로맨스, 개연성 없는 줄거리를 그럴듯하게 포장한 시나리오, 하긴 요즘 누가 그런 거에 신경 쓰나……? 흥행은 하겠지.”
미아는 그를 너무 잘 알기에 이 정도로 그치지 않을 줄 알고 있었다. 크레스턴은 이렇게 덧붙였다. 그녀의 연기는 훌륭했다, 노출이 너무 잦은 건 좀 그랬다, 세 장면 다 엉덩이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을 텐데, 다음에는 신경 써야 할 거다, 배우 인생에 좋은 이력을 남기기 위해라도. 사람들은 대번에 배우의 급을 나눠버린다면서.
“영화가 어땠는지 그냥 솔직하게 말해요, 크레스턴.”
“당신 연기는 훌륭했는데…… 배역이 문제였어요. 아무리 그래도 두 번의 배신, 세 번의 간통, 차 한 잔 마시는 사이에 가을이 지나가는 전개, 그런 영화를 계속할 수는 없어요. 액션 영화는 카메라 이동이 많고, 배우들도 마찬가지고……. 무슨 말을 더 듣고 싶어요?”
“진심, 크레스턴!”
“형편없어요, 남편과 같이 출연하는 것 아니면 관객이 몰릴 일 없는 아주 형편없는 영화! 그 자체만으로 이벤트는 되니까. 매스컴은 스크린에 보이는 당신 부부의 공모를 아주 재미있어하겠죠. 당신이 남편에게서 스타 자리를 빼앗으면 훨씬 더 좋아할 테고. 그건 찬사가 아니리라는 것만 알아둬요. 보나 마나 뻔하니까.”
“스타는 남편이죠, 내가 아니라.” 미아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크레스턴이 수염을 비볐다. 많은 뜻을 담은 동작이었다.
“요즘은 사이 어때요?”
“이젠 정말, 더는 아니에요.”
“잠깐, 미아, 바보 같은 짓은 안 돼요.”
“무슨 바보 같은 짓?”
“무슨 말인지 잘 알면서. 그렇게 나빠요?”
“같이 영화 찍었다고 가까워질 것 같으면 뭐 굳이….”
“그거야말로 내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인데, 적어도 개봉 때까지는. 배역과 배우의 사생활이 웬만큼은 비슷해야 되는데……. 그에 따라 걸작의 미래가 좌우되니까.”
“나를 위한 시나리오는 있어요?”
“몇 작품 갖고 있어요.”
“크레스턴, 외국으로 나가고 싶어요. 런던에서, 이 무미건조한 일상에서 멀리 떠나 지적이고 감성적인 인물을 연기하고 싶어요. 나를 감동시키고, 웃게 해주고, 애정 표현을 나누는 스토리가 있는 영화, 아주 작은 영화라도.”
“내 재규어는 낡았지만 절대 고장 나지 않죠. 왜냐, 얼마나 자주 차를 맡기면 정비사가 나를 스스럼없이 이름으로 부를까. 그 정도로 내가 차에 신경을 쓴다는 얘기예요. 나는 당신의 활동 무대를 위해 온 힘을 쏟았고, 당신은 이 영국에서 엄청난 관객몰이를 하는 배우가 되어가고 있어요. 당신 목소리 한번 들어보겠다고 어떻게든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팬들이 생길 정도로 이제는 영국 어디서나 사랑받기 시작했다고요. 요즘은 좀 정숙하지 못한 이미지가 됐지만, 내 예상대로 이번 영화가 흥행하면 머지않아 당신 세대에서 가장 인정받는 여배우가 될 겁니다. 그러니까 부탁인데 조금만 참아요. 알았죠? 몇 주 후에는 미국에서 빗발치듯 영화 제의가 들어올 거니까. 큰 무대에 뛰어들게 될 테니 두고 봐요.”
“슬플 때 미소 짓는 멍청한 여자 역할이겠죠?”
크레스턴은 안락의자에서 자세를 바로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런 배역도 있고 행복한 배역도 있어요. 그러니까 미아, 제발 그런 슬픈 얼굴 하지 마요, 더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 덧붙였다. “당신과 당신 남편의 인터뷰도 잡혀 있는데. 특히 프로모션 기간에는 다정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거 잊지 마요.”
미아는 책장 쪽으로 돌아서서 선반에 놓인 담배 상자를 열고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내가 싫어하는 거 알 텐데. 내 사무실에서 담배 피우는 거.”
“근데 왜 준비해놔요, 담배를?”
“절박한 때를 위해.”
미아는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가에 문 채로 크레스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도로 앉았다.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안 그런 사람 있나?” 크레스턴은 우편물을 살펴보면서 대꾸했다.
“재미있는 일이 없어요, 전혀.”
크레스턴은 우편물 읽는 걸 포기했다.
“어떻게 바보 같은데요? 그러니까 내 말은, 어쩌다 한 번씩인지, 아니면 늘 그런 건지.”
“뭐가 다른데요?”
“그러는 당신은? 당신이 남편 배신한 적은 전혀 없고……?”
“네. 아니, 딱 한 번 키스는 했어요. 내 상대 배우가 키스를 아주 잘하기로 소문난 남자였는데 솔직히 나도 키스 받고 싶은 욕망이 있었죠. 어쨌든 그 신을 실감 나게 하기 위한 거였으니까 진짜 배신은 아니잖아요?”
“중요한 건 의도니까. 어떤 영화에서?” 크레스턴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미아는 창밖을 내다봤고 에이전트는 한숨을 쉬었다.
“좋아요, 그가 당신을 배신했다고 칩시다.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게 뭐가 중요하죠?”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 남편이지, 나는 사랑해요.”
크레스턴은 서랍을 열어 재떨이를 꺼내놓고 성냥을 칙 그었다. 미아가 길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크레스턴은 눈이 따가운 건 담배 연기 때문이겠지, 생각하면서 미아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비드는 스타였고, 당신은 신인이었죠. 다비드는 대작 「피그말리온」의 주인공이었는데 이제는 제자가 스승을 넘어섰으니……. 자존심 때문에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거예요. 담뱃재 조심, 아끼는 카펫이라서.”
“그렇게 말하지 마요. 사실이 아니니까.”
“물론 그렇죠. 다비드가 이제는 훌륭한 배우가 아니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럼 뭐예요?”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합시다. 지금은 다른 약속이 있어서.”
크레스턴은 책상을 한 바퀴 돌아와 미아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재떨이에 대고 짓이겼다. 그러고는 미아의 어깨를 움켜잡고 문 쪽으로 데려갔다.
“머지않아 당신이 원하는 곳에서 연기할 날이 올 겁니다. 뉴욕, 로스앤젤레스, 로마. 그러니까 그사이 바보 같은 짓 하지 마요. 한 달만 참아 달라, 내 부탁은 그게 다예요. 당신의 미래가 달려 있으니까. 약속하죠?”
크레스턴의 사무실을 나온 미아는 택시를 타고 옥스퍼드 거리에서 내렸다. 울적할 때면 활기가 넘치는 상점가를 돌아다니는데, 최근 몇 주는 그 어느 때보다 우울했다.
미아는 대형 상점이 즐비한 가로수 길을 걸으면서 다비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었다.
이 늦은 오후에 다비드는 뭘 하고 있을까? 이틀 동안 대체 어디 가 있는 걸까? 집 전화 응답기에 남긴 메시지 말고는 이틀 밤낮 동안 전화 한 통 없었다. 재충전하러 시골로 떠나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짧은 메시지 한 개만 달랑. 미아는 오히려 더 불안했다.
미아는 집으로 돌아와 마음을 다잡았다. 다비드가 돌아왔을 때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일이었다. 감정을 절제하고 의연하게, 그가 없는 동안 목이 빠져라 기다렸을 거란 생각은 아예 못하게 하고, 무엇보다 어떤 질문도 하지 않을 것.
미아는 한 레스토랑 개업식에 같이 가자고 조르는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한껏 멋을 부리고 참석하기로 했다. 그녀도 다비드를 질투 나게 할 수 있었다. 궁상맞게 집에 우두커니 있느니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게 훨씬 나을 터였다.
큰 레스토랑이었다. 음악 소리가 너무 크게 울리고 사람들이 북적거려서 누군가에게 말을 붙일 수도,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고서는 발을 한 발짝 떼기도 힘들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누가 즐길 수 있겠어? 미아는 인파를 뚫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입구에서 플래시가 계속 터졌다. 친구가 그렇게 같이 가자고 조른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잡지의 연예란에 실리고 싶은 허영심. 덧없는 유명 연예인 바라기. 빌어먹을, 다비드, 당신 왜 나를 이런 곳에서 혼자 배회하게 만드는 거야? 백만 배로 갚아주겠어, ‘나 재충전 필요해’ 씨.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 불명 전화. 이 시간에……. 다비드가 틀림없다. 이렇게 음악 소리가 꽝꽝 울리는데 어떻게 통화를 하지? 내가 명사수라면 그냥 디제이를 쏴버릴 텐데.
주위를 둘러보니 지금 서 있는 곳은 입구와 주방 사이의 작은 복도였다. 인파에 떠밀려 들어가고 있지만 반대 방향으로 빠져나가기로 하고 미아는 휴대전화에 대고 소리쳤다.
“끊지 마!” 마음 들키지 않겠다고 다짐하더니, 너 아까 그 사람 맞아? 미아, 잘하는 짓이다. 하이힐 신은 콧대 높은 여자와 그녀에게 치근거리는 얼간이를 떠밀면서 비쩍 말라선 뱀장어처럼 흐느적거리는 여자의 발을 밟고, 껄떡거리는 덜떨어진 인간 옆을 돌아서 미아는 길을 뚫어나갔다. 멍청한 놈, 좋아 죽겠단다, 딱 봐도 맹해 보이는 여자한테. 문까지는 열 걸음 이상 남았다.
“끊지 마, 다비드!” 미아, 너 뭐라는 거야, 입 다물어. 멍청하기는.
미아는 레스토랑 직원에게 여기서 빠져나가게 도와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마침내 바깥, 시원한 공기, 상대적으로 조용한 거리. 뭣도 모르고 지옥 같은 곳으로 들어가겠다고 줄 서 있는 사람들에게서 미아는 멀리 떨어졌다.
“다비드?”
“당신 어디야?”
“파티…….” 어떻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지, 뻔뻔하게?
“재미있어, 여보?”
위선자! “응, 아주 즐겁지…….” 그러는 당신은 어디로, 뭘 찾으러 간 건데? 한심한 인간. “당신은 어디 있는데.” 이틀 동안이나?
“집으로 가는 중. 당신은 다시 들어가나?”
“난 택시 안이야…….” 택시를 잡아야 해, 빨리.
“파티에 있다면서?”
“당신이 전화했을 때 나가는 중이었어.”
“그럼 나보다 먼저 도착하겠네. 피곤하면 기다리지 마. 이 시간에도 차가 엄청 밀리네. 런던은 정말 견디기 힘든 도시가 되었어!”
견디기 힘들게 된 건 당신이야. 감히 어떻게 기다리지 말라는 말을 해, 나한테? 당신만 기다린 지 이틀인데.
“침실에 전등 하나는 켜놓을게.”
“그래주면 고맙지, 이따 봐.”
비에 젖은 인도, 우산 속 커플들…….
……그리고 혼자 서 있는 나, 멍청하게. 내일, 영화고 뭐고 삶을 바꾸겠어. 아니, 내일은 무슨, 오늘 저녁부터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