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왜 거울에서 나는 불안을 보는가?

<불안과 함께 살아지다>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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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 커다란 세트장이란 사실도, 자신의 삶이 시청자들에게 낱낱이 공개되는 관찰 예능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트루먼은 이미 관찰의 시선에는 익숙해져 있다. 관계 속을 살아가는 삶 자체가 타인의 시선을 전제한 어느 정도의 연출이라는 사실도 부정할 수는 없지 않던가. 영화 <트루먼 쇼> 내에서 트루먼의 타인으로 출연하는 배우들은 시청자들과 함께 모든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트루먼의 관찰자이지만, 그들 역시 시청자들에 의해 관찰을 당하는 입장이다.

수많은 관계를 욕망하고, 강요받고, 피곤해하며 살아가면서, 때때로 그 관계로부터의 자유를 꿈꾸지만 또한 외로움에는 취약한 사회적 존재. 정작 그 자유의 순간에는 자신을 보아주는 세상의 시선이 없다는 사실이 불안이다.

거울을 바라보는 행위조차도 자신의 시선보다는 타인의 시선이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한다. 유행하는 헤어스타일과 화장법, 남자들이 좋아하는 바디라인과 여성들이 좋아하는 코디 등등. 거울에 참여하고 있는 타자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재정립하면서도 그걸 개성이라고 바득바득 우기는 모순. 그렇듯 우리는 ‘나’로 살아가기보다는 ‘너’로 살아가는 시간에 익숙하다. 어쩌면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고, 거울 속의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들장미 소녀 캔디의 경우는, 타자의 시선에 중독된 고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수많은 거울에 둘러싸여 있다. 타자의 시선 속에 비친 자신을 자아로 인식한다. 캔디의 거울 속으로 언제고 캔디의 어깨를 다독이는 테리우스가 다가온다는 해피엔딩은, 상대적 박탈감으로 다가오는 허구이기도 하다. 우리의 현실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는 거울의 대답을 매일같이 기대하는 이블 퀸에 가깝다. 세상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늘 불안이고 걱정이기에, 타자의 거울을 떠나지도 못한다. 백설공주에게 독사과를 건넨 이블 퀸의 다른 손에는 거울이 들려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질투와 시기의 본능을 관용과 배려의 도덕으로 숨기려 드는, 우리 스스로의 가증스러움이 충분히 증명하고 있지 않던가.


1.jpg?type=w1200 김현정, <#백설그램>, 139x110cm, 한지 위에 수묵과 담채(콜라주), 2016.


매일같이 SNS에 업데이트되는 한 장의 일상에도 수많은 타자의 시선이 함께한다. 구글과 애플이 지배하는 세상에선 홀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드물다. 타자의 시선을 등에 지고, 반드시 사진을 찍어야 할 포인트들을 들르러 떠나는 관광이 있을 뿐이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했던가. 인간은 외로움에 취약한 존재들이다.

우리는 부단히도 ‘남들처럼’, 혹은 ‘남들보다’의 가치에 준해 자신의 삶을 비교한다. 남들이 소유한 것들을 자신도 소유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로써 ‘남들’에 소속되고자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남들’이 되어주며 너도나도 소유하길 원하기에, 결국 이 ‘남들’이라는 집단은 실제로 무언가를 공통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결과가 원인으로 순환하는 괴이한 현상이다.

소속에 대한 강박이 짓누르는 상황에선, 선택에 대한 판단은 조급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부터 청춘들의 비극이 시작된다. 진로의 선택에 있어 적성과 포부보다 앞선 가치는, 남들과 같은 ‘소비’의 자격을 부여해주는 급여이다. 자본이 곧 적성이며 포부이다.

이런 문제는 인생의 전제를 행복으로 규정하고, 그 잣대인 ‘타자의 평균’ 역시 행복으로 전제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오류이다. 자신도 남들처럼 행복해져야 함에도, 남들만큼 행복하지 않은 자신의 현실을 결핍으로 느끼는 것이다. 행복을 전제하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행복의 정의가 타자의 욕망에 부합하는 이상적 자아라는 것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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