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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un 11. 2018

04. 작은 양조장, 큰 양조장

<슬픈 날엔 샴페인을>



흐린 하늘 밑의 겨울 포도밭은 우르르 몰려다니는 새떼들을 빼면 아무 움직임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겨울은 새로운 와인이 태어나기 위해 다시 준비하는 계절이다. 겨울엔 포도나무밭 사이사이에 풀씨를 뿌린다. 이것을 커버 크랍(cover crop)이라고 한다. 경사진 땅에는 특히 중요한 과정인데, 풀이 자라 경사진 언덕의 흙이 깎여 내려가는 것을 막아주고 빠져나간 탄소나 질소, 칼륨 등 중요한 영양소를 보충해주기 때문이다. 주로 클로버와 콩, 귀리, 보리, 또는 겨자 꽃 같은 것들을 심는데, 이런 작물들은 수확량도 높여주고 흙의 성질을 좋게 해주며 비가 내리지 않아 메마른 밭에서 적은 양이나마 수분을 머금어주기 때문에 흙의 습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포도나무 새싹이 올라오고 꽃이 피기 시작하면 모두 깎아내야 한다. 흙에 있는 영양분이 그대로 나무에게 전달되게 하기 위해서다. 반대로 평평하고 수분이 많은 땅이라면 풀이 그 수분을 대신 머금고 있도록 깎지 않고 그냥 내버려둔다. 그 해에 가뭄이 심했다면 새순이 돋기 한 달 전인 겨울부터 나무에 충분한 물을 지속적으로 뿌려줌으로써 수분이 흙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
  
이른 봄에는 가지치기(pruning)를 시작해야 한다. 가지치기는 오랜 경험이 필요한 일이다. 가지치기는 포도나무의 골격이 건강하게 유지되고 열매가 튼실하게 맺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봄이 한창일 때는 새로 올라온 어린 이파리를 조심스럽게 솎아내고, 작은 꽃이 열매로 변하는 늦봄에는 갓 태어난 아기를 걱정하듯 매일같이 내일 날씨를 주시해야 한다. 갑자기 서리라도 들이닥치면 그해의 농사가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평지에 있는 포도밭은 산에서부터 내려오는 무겁고 차가운 기운에 얼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커다란 선풍기 같은 것을 밭 한가운데 설치해서 찬 기운을 휘저어주거나 나무 위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해서 물을 뿌려준다. 잎이 무성하게 오르기 시작하는 초여름에는 잎을 하늘 쪽으로 추켜올리고 철사로 고정시켜서 가능하면 포도송이가 햇빛을 많이 받을 수 있게 해준다.
  
작은 양조장의 주인은 해가 잘 들고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기후에서 우수한 품종의 포도나무를 재배한다. 낮과 밤의 온도 차이가 당도와 산도가 풍부한 열매를 맺게 해준다. 여름을 보내고 수확을 준비해야 하는 9월이 되면 그는 작고 초라한 연구소에서 매일매일 포도알의 산도와 당도를 테스트한다. 마침내 때가 됐다고 생각되면 미숙하거나 온전하지 않은 송이는 그대로 나무에 남겨두고 완전하고 충실한 포도송이만 골라 해가 뜨기 전부터 따기 시작한다. 해가 오르면 선선했던 아침 기온이 올라가면서 포도알의 당도와 산도에 변화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질의 포도송이만 선별해서 수확하기 때문에 같은 면적의 땅에서 남들이 거둬들이는 양보다 적게 수확한다. 매일 마시는 일반적인 품질의 와인을 만든다면 세 배가 넘는 포도를 수확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모두 손으로 수확한 포도는 즉시 양조장으로 옮겨지고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이동하면서 한 알 한 알을 손으로 가려낸다. 바람 빠진 고무풍선 같은 것이 들어가 있는 둥근 압착기 안으로 들어간 포도알들은 풍선이 천천히 부풀어 오르면서 벽으로 밀려가고 부드럽게 으깨어진다. 그렇게 짜인 포도주스 원액을 머스트(must)라고 부른다. 플라스틱이나 고무호스를 타고 발효 통으로 옮겨진 머스트가 발효되는 동안 작은 양조장의 주인은 정해진 시간마다 발효 통의 온도를 확인하고 발효될 때 생기는 열 때문에 위로 솟아오르는 씨앗과 껍질을 지속적으로 휘저어준다. 껍질과 씨앗에서 색을 비롯해 타닌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성분을 얻기 위해서이다.



발효가 끝난 머스트는 드디어 와인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제 막 발효가 끝난 와인은 길들여지지 않은 말처럼 정숙하지가 않다. 완전한 와인으로 탄생시키려면 숙성 과정은 꼭 필요하다. 고급 와인의 경우, 어둡고 온도와 습도가 일정한 창고 안에서 2, 3년 정도 머무르게 된다. 작은 양조장에서는 각각의 통에 세세하게 기록된 그만의 이력서를 붙여서 보관한다. 숙성을 마치고 와인을 병입(bottling, 병에 음료를 채워 넣기)할 때는 값이 좀 더 나가는 긴 코르크(cork) 마개를 사용해서 봉하고(고급 코르크 하나의 가격은 3달러 정도이다) 다시 1년이나 2년 정도 창고에서 더 보관된다. 해가 지날수록 와인들은 늘어가고, 한 병 한 병 숙성되면서 나갈 순서를 기다리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의 와인은 다른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생산된 와인들에 비해 값이 비쌀 수밖에 없다.
  
양질의 와인을 만들기 위한 방법은 큰 양조장에서도 별 차이가 없지만 작은 양조장보다 작업 과정이 훨씬 능률적이다. 과학적인 발효와 품질관리 방식, 자동화된 대량생산 시설 그리고 대량판매와 마케팅 시스템 덕분에 병에 붙어 있는 라벨을 떼어버리면 작은 양조장에서 나온 와인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양질의 와인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시스템은 미국 와이너리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13~14도 정도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대규모 숙성창고에는 대부분 225리터짜리 오크통들이 채워져 있고 60~70퍼센트의 습도를 지키기 위해 규칙적으로 수증기를 뿌려주거나 대형 동굴 속에 보관된다. 큰 양조장은 와인 메이커의 생각에 따라 각 통의 개성을 살피면서 다른 통과 배합해서 완성된 와인을 만든다. 맛과 질의 균형을 갖추기 위해서다. 한 품종의 와인을 다른 품종의 와인과 섞는 것은 프랑스 와인의 오래된 특징이기도 하다. 큰 양조장에서는 매일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할 수 있는 멋진 테이스팅 룸을 갖춰놓고 시음도 하고 홍보도 하고 판매도 한다.
  
같은 와인이라도 작은 양조장에서 나온 와인은 큰 양조장의 와인이 가질 수 없는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가 자란 곳의 흙과 날씨, 자기를 키운 주인의 세심한 성격과 신선한 오크통 속에서의 접촉 같은.그런 과정을 통해 얻어진 자기만의 개성을 담고 있다는 말이다. 무등산 수박을 즐기면서 광주의 산세가 떠오르고, 제주도 수박을 맛보면서 그곳 여름의 비바람을 느낄 수도 있다. 이렇게 무등산과 제주도의 수박 맛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를 맛보고 즐기는 것처럼 작은 양조장과 큰 양조장에서 나온 와인의 미세한 차이를 느끼고 상상해보는 것은 와인이 있는 식탁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어준다. 당신과 나 사이에 앉아 있는 이국의 와인 한 병은 우리를 바다 넘어 파란 하늘 밑의 초록 포도나무밭으로 안내해준다. 그림이나 영화에서나 보았던 그들의 음식에 대해서, 문화나 역사에 대해서, 그 지역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해준다. 와인 한 병이 우리를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게 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와인을 가까이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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