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함께 살아지다>
《팔레르가 운트 파팔리포메나(Parerga und paralipomena)》라는 쇼펜하우어의 저서에는, 여러 작가들에 의해 자주 인용되는 고슴도치 우화가 적혀 있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선 고슴도치들은, 자신들의 가시로 서로를 찌르기 때문에 이내 다시 멀찌감치 떨어진다. 그러나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서로의 체온이 필요한 상황,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다가 결국엔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적정 거리를 깨닫게 된다.
이 우화를 인용하는 대부분이 관계 유지를 위한 ‘적당한 거리’에 대해 설명하지만, 쇼펜하우어의 본래 의도는 다소 다른 뉘앙스이다. 거리가 너무 멀어지면 외로움을 느끼고, 너무 가까워지면 부담을 느끼다 못해 어느 순간부터는 성가시고 귀찮기까지 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적당한 거리’를 훌륭한 매너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지적하는 바는 그 거리감이 지닌 공허함이다. 혼자 있으면 외롭지만, 함께 있으면 불편한 딜레마 사이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으면서 적당한 거리를 두는 인간관계. 쇼펜하우어는 상처받지 않겠노라 유지하는 일정간극이 과연 올바른 거리인가를 묻고 있다.
극복이라는 것도, 자신이 불편해하는 것들 속으로 뛰어들어 그것들과 직접 부딪히는 시간 속에서나 가능할 수 있는 성과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현대인들이 택하는 극복의 방법론은 극복의 대상으로부터 일정 거리로 물러나는 것이다. 삶에 관한 문제들 모두가 이 맥락에서 비껴가지 않는다. 게오르그 짐멜에 따르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좁아질수록, 무의식은 자신의 고유 영역이 침범받고 있다는 불안을 느낀단다. 때문에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사람 사이의 좁아진 거리만큼 자기 안으로 파고들기 마련이다.
외로울 땐 외로운 게 싫고, 외롭지 않을 땐 외로워지고 싶어 하는, 함께 모여 살면서도 각자의 외로움으로 살아가는 인간들. 人間이란 한자어를 오늘날의 시각으로 해석하자면, 사람 사이를 흐르는 관계의 정에 관한 것이라기보단 그 사이가 지닌 거리에 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독이란 감정마저도 관계를 매개로 한 이름일 정도로, 우리는 관계의 울타리를 벗어나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낯설어한다. 그러나 ‘발견’이란 것도 익숙한 것들의 낯선 뒷모습인 경우가 많다. 고독은 관계로부터 소외된 나 자신을 낯설게 돌아보는 발견의 시간이다. 물론 발견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면, 그 낯섦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고독의 도래에 너의 의지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점이 슬플 뿐이다.
그렇게 저 스스로 가두어버린 소외였음에도, 우리는 그것에게 곧잘 지독함이란 수식어를 붙인다. 오랜 시간 동안을 외로움과 함께하며 그것에게 익숙해지고 무뎌질지언정, 그것과 친해지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고독의 그림자로부터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할 즈음에야, 단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한 번쯤은 겪어볼 만한 시간이었다는 사실 정도만을 깨달을 뿐이다.
반면 인류사의 위대한 정신들이 가장 필요로 했던 시간이 고독이기도 했다. 모든 관계가 단절된 격리는, 구조를 지탱하는 부품으로서의 역할이 아닌 하나의 ‘인격’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며, 태초의 자신으로 돌아가 스스로에 대해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니체는 관계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가벼워질 수 있는 상태라고 표현한다.
타인에게 분산되지 않는 시선으로 스스로에게 전념하는 시간, 많은 철학자와 문인들이 그런 고독의 힘을 믿고 살았다. 니체가 높이 평가하는 고귀한 인간은 고독 속을 걷는 존재이다. 니체에겐 고독을 모르는 인간들은 정신적으로 독립이 안 된 그저 ‘평균인’에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