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내 인생이 딱 이런데

<피에스 프롬 파리>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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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다음 날, 파리.

“왜 항상 현관 열쇠를 맨 마지막에 달아놔?” 미아가 물었다.
“혹시 모르잖아. 층계 통로가 어둠에 잠겨 있을지.” 다이지는 휴대전화 불빛으로 열쇠 꾸러미를 비춰주면서 대답했다.
“더 이상은 누군가의 생각을 존중해주고 싶지 않아, 절대로. 난 나와 관련된 현실을 원해. 현재, 오직 현재.”
“나는 덜 불확실한 미래.” 다이지가 한숨을 쉬었다. “못 하겠으면 열쇠 이리 줘. 배터리 거의 다 됐어.”

꾸러미의 마지막 열쇠가 돌아갔다. 다이지가 아파트로 들어가면서 스위치를 눌렀는데 전등이 들어오지 않았다.

“건물 전체에 불이 안 들어오는 것 같아.”
“내 인생이 딱 이런데.” 미아는 한술 더 떴다.
“그렇게까지 과장하진 말자.”
“거짓말 속에서 살 순 없어.” 미아가 동정에 호소하는 어조로 말했지만, 그녀를 너무 잘 아는 오랜 친구 다이지는 말려들지 않았다.
“막 던지지 말지, 잘나가는 배우 아니랄까 봐 거짓말도 아주 프로급이네. 양초를 어디 뒀더라, 빨리 찾아야 하는데. 배터리가….”

휴대전화 화면이 꺼졌다.

“다 집어치우겠다고 말할까?” 미아가 속삭였다.
“나를 좀 도와줄 생각은 안 들어?”
“그러고 싶지, 근데 진짜 아무것도 안 보여.”
“안다니 다행이다!”

다이지는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손이 탁자에 스치자 옆으로 돌다 의자에 부딪친 다이지는 구시렁거리면서 바로 뒤에 있는 조리대에 이르렀다. 그리고 계속 더듬거리며 가스레인지에 다가갔다. 선반에 놓인 성냥을 집어 들고 가스레인지의 버튼을 돌려 불을 붙였다.

푸르스름한 불빛이 다이지가 서 있는 곳을 밝혀주었다.

미아가 식탁 앞에 앉았다.

다이지는 서랍을 하나씩 뒤졌다. 향초는 그녀의 집에 있어서는 안되는 물건이었다. 미식에 대한 철칙이 워낙 엄격해서 요리에 방해가 되는 냄새는 절대 금물이었다. 출입문에 ‘당 업소는 신용카드를 받지 않습니다’라고 쓴 안내문을 붙여놓은 레스토랑은 더러 있지만 다이지는 아마 기꺼이 이렇게 써 붙이고 싶을 것이다. ‘우리 레스토랑은 너무 심하게 향수를 뿌린 손님을 받지 않습니다.’

다이지가 양초를 찾아서 불을 붙였고, 그 불빛에 방이 어둠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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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지의 아파트는 요리를 위한 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실 하나만 가장 넓고, 욕실을 사이에 두고 작은 방이 두 개 있었다. 조리대 위엔 백리향, 월계수, 로즈마리, 회향풀, 마요라나, 광대나무과 식물, 에스플레트산 고추가 자라고 있는 테라코타 화분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주방은 다이지가 요리 개발에 열중하는 연구실이었다. 여기서 개발한 레시피로,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는 몽마르트르 언덕에 위치한 자기 레스토랑 손님들에게 요리를 선보인다.

다이지는 이름난 요리학교 출신이 아니라 고향 프로방스의 집에서 어깨 너머로 배운 솜씨로 요리한다. 친구들이 소나무와 올리브 나무 그늘에서 뛰어놀 때, 어린 다이지는 엄마 옆에 붙어서 하나하나 흉내내며 프로방스 요리를 배웠다.

다이지는 집을 둘러싼 정원에 키우는 향신용 식물을 분류해서 조리하는 법도 배웠다. 그녀에게 요리는 삶이었다.

“배고파?” 다이지가 미아에게 물었다.
“응, 아마도. 아니, 모르겠어.”

다이지는 냉장고에서 버섯 한 접시와 파슬리 한 줄기를 꺼냈고, 냉장고 오른쪽에 걸어놓은 마늘 꾸러미에서 한 통을 떼어냈다.

“마늘이 꼭 필요해?” 미아가 물었다.
“오늘 밤에 누구랑 키스라도 할 거야?” 다이지는 칼로 파슬리를 잘게 다지며 받아쳤다. “요리하는 동안 무슨 일인지나 얘기해보지?”

미아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아무 일 없었어.”
“넌 여행 가방을 끌고 가게 문 닫는 시간에 불쑥 나타났어.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로. 그러고는 계속 구시렁거렸고. 그것만으로도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내 세상은 무너졌어, 진짜로.”

다이지가 칼질을 멈췄다.

“미아, 제발! 난 다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한숨이나 한탄은 집어치워. 여긴 촬영장이 아냐.”
“너 영화감독해도 되겠다, 훌륭해!”
“어쩌면. 이제 털어놔봐.”

다이지가 바쁘게 요리하는 사이 미아는 고백했다.



갑자기 전기가 들어오자 두 친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이지는 스위치를 눌러 조명을 약하게 한 다음 전기로 작동하는 겉창을 열었다. 아파트 창문 밖으로 파리 전경이 드러났다.

미아는 창문 앞으로 갔다.

“담배 있어?”
“낮은 탁자에. 누가 두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집에 누가 담배를 두고 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많아, 남자가?”
“담배 피울 거면 테라스로 나가!”
“너는? 나올 거지?”
“뒷얘기 궁금하면 따라 나와라?”



“그래서 침실에 불 켜놨어?” 다이지가 와인을 따르면서 물었다.
“응, 드레스룸에는 켜놓지 않고. 거기다 의자를 끌어다 놨거든, 걸려 넘어지라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갈 테니까? 그다음은?”
“나는 자는 척했지. 근데 욕실에서 옷을 벗고 샤워를 오래 하더라. 그러고는 나와서 침대에 눕더니 램프를 끄는 거야. 난 그가 뭐라고 속삭이며 안아주길 기다렸는데 그대로 잠들어버리더라고. 충분한 재충전을 못 했다, 그거겠지.”
“내 생각 듣고 싶어? 그럼 말할게. 넌 더러운 놈과 결혼한 거야. 그의 장점이 단점을 덮어줄 수 있느냐, 그걸 생각해보면 문제가 아주 간단해지지. 아니, 어쩌면 진짜 생각해봐야 할 건 다비드 때문에 불행한데도 너는 왜 계속 그를 사랑하는지야. 너를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라면 몰라도.”
“나를 아주 행복하게 해줬어, 처음에는.”
“그랬겠지! 처음부터 비열하게 굴면 매력적인 왕자님들은 문학에서 싹 사라지고 로맨틱코미디는 호러로 장르가 바뀔 텐데.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미아. 다비드가 너를 배신한 건지 알고 싶으면 그에게 물어봐야지, 내가 아니라. 그리고 이제 담배 좀 꺼. 너무 많이 피운다. 그건 담배지 사랑이 아냐.”

미아의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다이지가 미아 옆으로 가서 안아주었다.

“실컷 울어, 그래서 풀린다면 울어. 실연은 처절한 아픔이지만 진짜 불행은 삶이 사막 같을 때야.”

미아는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다이지 앞에서는 무너졌다. 우정이 아주 오래되다 보면 자매같이 친밀한 우애가 형성되는 법이다.

“왜 사막이야?” 미아가 뺨을 닦으면서 물었다.
“그럼 내가 뭐라고 하겠어? 네가 물어보는 방식이 그런데.”
“너도 외롭잖아? 언젠가는 행복해질까?”
“내가 느끼기에 넌 불행하지 않았어, 최근 몇 년간은. 넌 모두가 인정하는 이름난 배우야. 나는 인생을 걸고 벌어야 하는 돈을 너는 영화 한 편으로 벌지. 그리고…… 넌 결혼도 했고. 신문을 보면…… 너 이렇게 불평이나 하고 있으면 안 될 텐데.”
“왜, 무슨 일 났어?”
“전혀. 좋은 뉴스가 있었으면 이렇게 조용하겠어,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겠지. 어땠어, 내 버섯 요리?”
“이 세상 최고의 치료제야, 네 요리는.”
“그게 내가 셰프가 되고 싶었던 이유지! 이제 가서 자! 내일 전화해서 네가 다 알고 있다고 퍼부어줄게, 네 빌어먹을 남편한테! 당신의 멋진 아내는 당신이 배신해서 떠나는 거라고,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바로 당신 때문이라고. 내가 전화를 끊었을 때 불행해지는 건 다비드일 거다.”
“안 그럴 거지?”
“응, 네가 그렇게 하라고.”
“그러고 싶어도 못 해, 나는.”
“왜? 시시껄렁한 멜로드라마로 만족하려고?”
“엄청난 예산이 들어간 영화야. 같이 포스터 촬영을 해야 해, 한 달 후에 개봉이거든. 원하던 걸 이룬 멋진 여자 역이라서 완벽하게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코미디를 해야 돼. 다비드와 나에 대한 진실이 알려지면 스크린에 비친 우리 커플을 누가 봐주겠어? 제작사가 날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내 에이전트도 마찬가지고. 나는 남편에게 배신 당했지만 현명한 여자이고 싶어. 공공연히 창피당하고 싶진 않아.”
“그래도 그런 역을 제대로 연기하려면 못된 여자일 필요도 있잖아.”
“내가 왜 여기 왔겠어. 난 절대 다비드를 오래 붙잡아둘 수 없어. 그러니까 네 집에서 지내게 해줘.”
“얼마나?”
“네가 날 참아줄 수 있는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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