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첫 소설

<피에스 프롬 파리>

by 더굿북
%E9%87%89%EB%9A%AE%EC%9C%B4%E7%A7%BB%EF%BF%BD.jpg?type=w1200&type=w1200



포르트 드 라 샤펠 도착, 폴은 오픈카 사브의 핸들을 잡고 세 줄로 늘어선 차들 사이를 비스듬히 비집고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헤드라이트로 항의성 신호를 보내거나 말거나 외곽 순환도로를 벗어나 A1 고속도로, 루아시 샤를 드골 공항 방향으로 진입했다.

“대체 왜 맨날 공항으로 마중 나가는 건 나지? 삼십 년 우정인데 그럴 수 있지, 뭐. 그래도 그 자식이 마중 나온 적은 없었어. 단 한 번도. 아무튼 난 이게 문제야, 너무 친절한 거! 하긴 내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둘이 함께 살기나 했겠어. 잇몸 드러내며 고맙다고 하기만 해봐, 아주, 둘 다 가만 안 둘 거야!” 폴은 백미러를 힐끔힐끔 보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그래, 뭐, 내가 조의 대부인데 어쩌겠어. 근데 왜 하필 나였지? 누구 다른 사람은 없었나? 필게즈? 그건 안 되지, 아내가 이미 대모를 서줬는데. 늘 서비스하고, 한평생을 서비스하면서 보내는 거, 그게 바로 내 지론이잖아. 서비스가 즐겁지 않은 건 아냐. 하지만 내 생각도 좀 해주면 좋겠다는 거지. 샌프란시스코에 살 때 로렌은 인턴 한 명쯤 나에게 소개해줄 수도 있었다, 그런 거지! 병원에 인턴이며 조수며 수두룩했는데, 한 번도 소개시켜준 적이 없었어! 물론 근무 시간 때문에 소개해주기 힘들었겠지. 저놈의 뒤차! 넌 아직도 헤드라이트 깜빡거리냐? 자꾸 그러면 나 급브레이크 밟는 수가 있다! 그나저나 혼자 중얼거리지 좀 마. 아서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나는 진짜 미친놈으로 보일 거라고. 그럼 누구랑 말해? 아, 내 소설 속 인물들 있잖아. 아냐, 입 다물어야 해. 늙은이도 아닌데. 노인들이 혼자서 말하잖아. 혼자 있는데 그럼 누구랑 말해? 노인들끼리 말하면 되지, 자식들도 있을 테고. 나한테도 언젠가는 자식이 있을까? 나도 늙어가는데.”

폴은 또다시 백미러를 봤다.
사브를 자동개폐기 앞에서 멈추고 주차권을 뽑았다. “고마워요.” 폴은 차창을 닫으면서 중얼거렸다.
도착 전광판에 AF83기는 제시간에 도착한다는 표시가 떠 있었다. 폴은 초조하게 발을 동동거렸다.
첫 번째 승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작은 무리, 아마도 퍼스트클래스 승객들이리라.




첫 소설을 발표한 뒤, 폴은 잠정적으로 건축가 활동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글 쓰는 일이 뜻밖의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그가 걸어온 길에서 미리 계획한 일이라곤 전혀 없었다. 삼십 페이지쯤 새까맣게 채우고 ‘끝’이라고 써넣을 때 기쁨을 느꼈다. 저녁마다 작업 중인 소설에 붙잡혀 거의 외출도 하지 않고 걸핏하면 컴퓨터 앞에서 저녁을 먹었다.

밤이면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 이젠 친구가 된 소설 속 인물들과 어울리는 게 행복했다. 그가 써 내려가는 글 속에서는 모든 게 가능했다. 원고가 완성되자 폴은 책상에 그대로 내버려 뒀다.

image_6858988341527472889695.jpg?type=w1200

그로부터 몇 주 후 아서와 로렌을 집으로 초대한 날, 폴의 인생이 바뀌었다. 그날 저녁 로렌은 병원의 이사직을 맡은 크라우스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폴에게 조용한 데서 통화해야겠다며 양해를 구하고 서재로 들어갔고, 아서와 폴은 거실에서 얘기하고 있었다.

크라우스 교수의 말을 듣다 지겨워진 로렌은 폴의 책상 위에서 원고를 발견했고,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며 읽기 시작했다. 원고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교수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놓칠 정도로.

마침내 교수가 전화를 끊었지만, 로렌은 원고를 계속 읽었다. 한 시간쯤 흘렀을 때 별일 없는지 보려고 폴이 서재에 얼굴을 디밀었다가 미소를 머금은 로렌을 발견했다.

“내가 방해했나?” 폴이 내뱉은 말에 로렌은 흠칫 놀랐다.
“와, 이거 굉장한데!”
“읽어도 되는지 나한테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어?”
“마저 읽고 싶은데 가져가도 돼?”
“보통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진 않는데!”
“네가 방금 말했으니까. 그래도 돼?”
“진짜 그렇게 마음에 들어?” 폴은 회의적인 어조로 말을 받았다.
“응, 진짜로.” 로렌은 원고를 차곡차곡 간추리면서 대꾸했다.
그러고는 원고를 집어 들더니 한 마디도 덧붙이지 않고 폴을 지나쳐 거실로 나갔다.
“예스, 라는 대답 들었어, 나한테서?” 폴은 로렌을 쫓아가면서 말했다.
폴은 로렌의 귀에 대고 아서에게는 원고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속삭였다.
“뭘 예스, 하는데?” 아서가 일어나서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글쎄, 뭘까? 난 모르겠는데.” 로렌이 대답했다. “이제 갈까?”
폴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아서와 로렌은 이미 층계참에 서서 저녁 초대 고마웠다고 말했다.



또 여행객 한 무리가 나왔다. 한 서른 명쯤. 하지만 폴이 기다리는 이들은 없었다.

“뭐 하느라고 안 나와! 비행기 안에서 진공청소기라도 돌리나? 파리에 살면서부터 내가 정말 그리웠던 게 뭘까? 카멜에 있는 아서 어머니의 집……. 주말마다 함께 어울려 해변으로 내려가 석양 바라보던 것. 어느덧 칠 년. 언제 그렇게 세월이 흘렀지? 그래, 가장 그리운 건 그들이야. 영상통화,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끌어안고 그 존재를 느끼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지. 자꾸 머리가 아픈 것에 대해 로렌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이건 그녀가 전문이니까. 아니, 로렌은 몇 가지 검사를 해보라고 할 거야. 그냥 단순한 편두통이라면서, 웃긴다고, 머리 아프다고 다 뇌종양은 아니라고. 아무튼 알게 되겠지. 이제 나올 때가 됐으려나?”




그린 가(街)는 텅 비어 있었다. 아서는 포드를 주차장에 세우고 로렌쪽으로 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함께 아담한 빅토리아 양식 주택의 계단을 올라갔다. 둘은 사귀기 전부터 한 집에서 산, 아주 특이한 커플이다. 하지만 그건 별개의 이야기니까 생략하고…….

아서는 중요한 고객을 위한 설계도 초안을 완성해야 했다. 로렌에게 미안하다면서 포옹한 다음 작업대 앞에 앉았다. 로렌은 재빨리 침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고, 폴의 원고에 몰두했다.

여러 번, 벽 너머에서 들리는 로렌의 웃음소리, 아서는 그때마다 시계를 봤고, 다시 연필을 들었다. 밤늦은 시간, 이번에는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아서는 일어나 침실 문을 살짝 열고 침대에 앉아 독서에 열중해 있는 아내를 발견했다.

“왜 그래?” 아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무것도 아냐.” 로렌은 원고를 덮으면서 대답했다.

그녀는 머리맡 탁자에 놓인 크리넥스 한 장을 뽑아 들고 똑바로 앉았다.

“뭐가 그렇게 슬픈데?”
“슬픈 거 아니야.”
“당신 환자 중 누가 안 좋아?”
“아니, 오히려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야.”
“좋은 일인데 운다고?”
“잘 거야?”
“당신이 왜 안 자는지 설명해주면.”
“나에게 그럴 권리가 있는지 모르겠네.”

아서는 고백을 받아내기로 작정하고 로렌 앞에 버티고 섰다.

“폴 때문에.” 로렌이 마침내 내뱉었다.
“폴이 아파?”
“아니, 폴이 글을 썼는데…….”
“폴이 뭘 썼는데?”
“말해주기 전에 폴에게 허락을 받아야 해서…….”
“폴과 나는 서로 비밀 같은 거 없어.”
“그렇긴 하지. 자꾸 묻지 말고 어서 와서 자, 밤이 깊었어.”

다음 날 저녁, 폴은 사무실에서 로렌의 전화를 받았다.

“할 말이 있어. 나 삼십 분 후면 일 끝나는데, 병원 맞은편 카페테리아에서 만나.”

폴은 어리둥절한 채 재킷을 걸치고 사무실을 나갔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서와 마주쳤다.

“어디 가?”
“내 아내 데리러, 병원에.”
“같이 갈까?”
“어디 아파?”
“얘기하자면 길어. 서둘러, 가면서 말할게.”

로렌이 병원 주차장에 나타나자 폴이 뛰어가서 붙잡았다. 아서는 둘을 잠시 지켜보다 다가갔다.

“우리는 집에서 봐.” 로렌이 아서에게 말했다. “폴과 의논할 게 있어서 그래.”

로렌과 폴은 아서를 따돌리고 카페테리아로 들어갔다.
“다 읽었어?” 폴이 웨이트리스에게 주문한 뒤 물었다.
“응, 어젯밤에.”
“좋았어?”
“되게 좋았어. 나랑 관련된 일도 꽤 있던데.”
“알아, 어쩌면 네 동의를 구해야 했을지도.”
“넌 그래도 돼.”
“어쨌거나 너 말고는 아무도 읽지 않을 테니까.”
“바로 그 얘기를 하고 싶어서 보자고 했어. 출판사에 보내보는 게 어때? 나는 출판될 거라고 확신하는데.”

폴은 이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우선 그는 자기 원고에 관심을 가져줄 출판사가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더더군다나 모르는 사람이 자기 소설을 읽는다는 생각은, 전혀.

로렌이 온갖 말로 설득했지만, 폴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로렌은 헤어지면서 이 비밀을 아서에게 얘기해도 되는지 물었고, 폴은 마치 전혀 못 들었다는 듯 대답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간 로렌은 아서에게 원고를 내밀었다.
“자, 읽어봐.” 로렌이 말했다. “다 읽고 나면 얘기하자.”

이번에는 아서가 웃는 소리를 로렌이 여러 번 들었다. 몇몇 대목에서 아서가 느낄 감정을 상상하면서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아서는 세 시간 후 거실로 나왔다.

“어때?”
“우리한테서 영감을 얻은 것 같은데, 아주 좋았어.”
“출판사에 보내라고 제안했는데 들으려고도 하지 않아.”
“내가 설득할 수 있어.”

폴의 원고를 꼭 출판시키고 싶다, 젊은 여의사는 그 생각에 집착하게 됐다. 로렌은 폴과 마주치거나 통화할 때마다 계속 같은 질문을 했다. 원고를 보냈느냐고. 그때마다 폴은 부정적으로 대답했다. 제발 부탁인데, 더는 집착하지 말아달라고.

어느 일요일, 오후 늦게 폴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로렌이 아니라 사이먼앤슈스터 출판사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아서, 되게 웃기니까 그만해.” 폴이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전화선 너머의 남자는 어리둥절해하더니, 마음에 쏙 드는 소설을 방금 다 읽었는데 저자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오해는 계속되었고, 폴은 농담으로 받아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재미있어하다 마침내 짜증이 난 편집자는 내일이라도 당장 사무실로 찾아와 농담이 아니라는 걸 보여줄 기세였다.

폴의 머릿속에 의혹이 스쳤다.

“내 원고는 어떻게 입수했습니까?”
“한 친구가 작가님을 대신해 보내줬습니다.”

편집자는 약속 장소를 정한 뒤 전화를 끊었다. 폴은 집 안을 서성거렸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사브에 올라타 운전대를 잡고 샌프란시스코 메모리얼 병원까지 달렸다.

폴은 응급실에 있는 로렌을 당장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간호사는 폴에게 환자로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폴은 간호사를 노려보며 응급 환자의 목숨에 의학적 순서라는 건 없다고 응수했다.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폴이 로렌에게 연락하는 사이, 간호사가 경비를 불렀다. 때마침 로렌이 폴을 만나러 나와줘서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

“무슨 일로 왔어?”
“출판사 다니는 친구가 있었나?”
“아니.” 로렌은 눈을 피하더니 구두를 내려다보면서 대답했다.
“그럼 아서의 친군가?”
“아니.” 로렌은 중얼거렸다.
“또 둘 중 한 명이 장난친 거지?”
“이번에는 아냐.”
“무슨 짓 했잖아? 빨리 불어!”
“나쁜 짓 아냐, 전혀. 결정은 네가 하는 건데.”
“자세히 말해봐!”
“내 동료 의사의 친구가 출판사 편집자야. 객관적인 의견을 들어보려고 내가 원고를 맡겼어.”
“너한텐 그럴 권리가 없어.”
“굳이 따지자면 너도 허락 없이 나에 대한 글을 썼잖아. 이번에는 그래줘서 오히려 고맙지만. 나는 운명에 도전했던 사람이잖아? 다시 말하는데 결정은 네가 하는 거야.”
“무슨 결정?”
“네가 쓴 걸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지 말지에 대한 결정. 네가 무슨 헤밍웨이는 아니지만 네 소설은 읽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어. 요즘 이런 소설 나쁘지 않아. 미안한데 나 빨리 들어가야 해, 일하다 나와서.”

로렌은 응급실 문으로 들어가기 전 뒤돌아봤다.
“특히 나한테 고맙다는 말은 안 해도 돼.”
“뭘 고마워해?”
“약속 장소에 나가, 폴. 고집부리지 말고. 참고로 난 아직 아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폴은 소설을 좋게 평가해준 편집자를 만나러 나갔다가 그의 몇 가지 제안에 굴복했다. 편집자 입에서 ‘소설’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폴은 그리 행복하지 않던 시절에 밤을 채워주던 이야기를 소설과 결부시키는 것이 힘들었다.

소설은 여섯 달 후 출판되었다. 책이 서점에 입고된 다음 날, 폴이 회사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동료 건축가 두 명이 그의 소설을 들고 있었다. 동료들은 폴에게 축하를 건넸고, 딱딱하게 굳은 폴은 그들이 내리길 기다렸다가 다시 일 층 버튼을 눌렀다. 그길로 매일 아침을 먹는 카페에 들어가서 앉았다. 카페 직원이 책을 샀다면서 사인을 부탁했다. 헌사를 쓰는 손이 떨렸다. 폴은 계산을 하고 집으로 가서 자기가 쓴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안락의자에 점점 더 몸을 파묻었다. 안락의자 속으로 사라져서 다시는 나올 필요가 없길 바라면서. 어린 시절과 꿈, 희망, 실패, 자신의 일부를 담은 소설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읽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고, 예상도 못 했다. 더군다나 같이 일하며 가까이 지내는 동료들이 읽게 될 줄이야. 고지식한 폴은 목소리를 크게 하고 눈을 부릅뜨고 팔을 건들거리는 것으로 병적인 수줍음을 가려왔는데, 이제는 자기 소설 속 인물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고 싶은 유일한 바람조차 가질 수 없게 되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03. 인생, 진짜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