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스 프롬 파리>
서점에 유통된 책을 모조리 사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폴은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지만 말도 꺼내기 전에 편집자가 일간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실린 기사를 읽어주면서 축하했다. 물론 흠을 좀 잡긴 했지만 공명정대한 평이었고, 신문에 실렸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홍보가 될 터였다. 폴은 전화를 탁 끊어버리고 신문 가판대로 달려갔다. 기사는 ‘첫 소설’의 잘못된 점들을 지적하면서도 감상벽에 대한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작가를 칭찬했다. 폴에게는 최악이었다. 지성보다 냉소주의가 두드러진 시대에 이 작품에서는 꽤 용감한 도전 정신이 보인다는 말로 기자는 글을 맺었다. 폴은 죽을 것 같았다. 돌연사도 아니고, 솔직히 그런 죽음이 부담은 적겠지만, 숨이 막혀 서서히 최후를 맞는 죽음.
휴대전화가 계속 울리고, 화면에는 모르는 번호들이 떴다. 그때마다 폴은 전화기를 던져버렸다. 결국 배터리를 빼버리자 화면이 꺼졌다. 폴은 출판사에서 마련한 칵테일파티에 참석하지 않았고, 그 주에는 사무실에도 나가지 않고 집에 틀어박혔다. 어느 날 저녁에는 피자 배달원이 전날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는 사진을 보고 알아봤다면서 소설을 내밀고 사인을 부탁했다. 식료품 가게에서도 같은 상황이 되풀이되자 폴은 칩거에 들어갔다. 아서가 현관문을 두드리며 강제로 집에서 끌어낼 때까지. 폴과 달리 아서는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면서 즐거워했다.
폴의 독창성에 미디어가 주목했다. 건축 사무실의 어시스턴트 모린이 정성스럽게 신문 기사들을 요약해놓았으며, 고객 대부분이 이미 폴의 소설을 읽었고, 전화로 축하해주었다는 소식이었다.
한 영화 제작자가 사무실로 폴을 만나러 왔었다는 것, 아서는 이 소식을 최후의 카드로 남겨두었다. 그가 단골로 다니는 반스앤노블 서점에서는 소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 정도만으로도 흔히 하는 말로 실리콘밸리 입성에 버금가는 성공인데, 서점에서는 곧 소설 판권이 전 세계에 팔릴 거라 전망하고 있었다.
아서는 폴을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나갔고, 면도도 하고 외모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때라며 출판사에서 메시지를 스무 개나 남겼다는 걸 상기시켰다. 그러니까 제발 장례식 가는 얼굴로 다니지 말고 인생이 제공하는 이 행복을 끌어안으라고 덧붙였다.
폴은 한동안 침묵하다 심호흡을 하면서 생각했다. 대중 앞에 나서면 울렁증이 더 심해질 텐데. 그때 폴을 알아본 한 여자가 다가와 자전소설인 거냐고 물으면서 식사를 방해했다. 숨통을 조이는 일격이었다.
폴은 진지한 어조로 일주일 동안 깊이 생각했다면서 아서에게 사무실을 맡기고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이번에는 폴이 안식년을 보낼 차례였다.
“뭐 하러?” 아서가 충격받은 얼굴로 물었다.
사라지려고 그런다. 폴은 입씨름하지 않으려고 반박할 수 없는 구실을 댔다. 두 번째 소설을 쓸 거다, 아니, 써볼 거다. 그렇다는데 뭐라고 막아서겠어?
“네가 원하는 게 정말 그거라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난 잊지 않고 있어, 내가 잘 안 풀리면 파리에 가서 얼마간 살고, 우리 사업은 네가 맡기로 했던 거. 어디로 떠날 건데?”
아무 계획도 없던 폴은 불쑥 대답했다.
“파리. 네가 경이로운 도시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잖아. 빛의 도시, 파리의 비스트로, 센강의 다리, 생동감 넘치는 거리, 파리지엔들……. 누가 알아, 운 좋으면 네가 그토록 자랑하던 아름다운 꽃집 아가씨를 나도 만나게 될는지?”
“어쩌면.” 아서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내가 말한 것처럼 모든 게 경이로운 건 아니야.”
“그때 너는 슬럼프에 빠져 있었으니까. 나는 그냥…… 주변 환경을 바꿀 필요가 있어, 내 창작력을 자극하기 위해서라도.”
“창작력을 자극하기 위해서라는데 누가 뭐라겠어! 그래서 언제 떠나려고?”
“오늘은 너희 집에서 저녁 먹자. 필게즈 부부도 초대하면 한꺼번에 작별 인사할 수 있으니까. 내일부터는 프랑스에서 아름다운 인생이 펼쳐지는 거지.”
폴의 계획은 아서를 몹시 우울하게 만들었다. 너무 성급한 결정이다, 그래도 몇 달은 시간을 갖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 사무실에도 좋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반대하고 싶었지만 우정 앞에 굴복했다. 만약 이런 기회가 아서에게 주어졌다면 폴 역시 최선을 다해 친구를 도우려고 했으리라. 이미 입증한 적도 있고. 건축 사무소는 아서가 알아서 잘 해낼 터였다.
아서와 헤어진 후, 폴은 공포에 질린 상태로 집에 들어갔다. 그런 생각이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거지? 파리에서 혼자 살겠다니!
집 안을 성큼성큼 걸어 다니면서 이 말도 안 되는 도피, 이 미친 짓을 하려는 이유를 곰곰 생각했다. 첫째, 아서도 했는데 못 할 거 없지. 둘째, 파리지엔들에 대한 아련한 동경. 셋째, 출판하지 않을 다른 소설을 외국에서라면 써볼 수도 있으리라는 것. 이 혼란스러운 상황이 정리되는 즉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오면 돼. 요컨대 한마디로 이렇다. 독신의 미국인 소설가, 파리로 떠나다!
파리에서 생활한 지 어느덧 칠 년, 그사이 폴은 소설 다섯 권을 썼다. 감정 기복이 심해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파리지엔들과의 연애에 질려서 독신을 택했다. 독신이 폴을 선택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리고 쓴 다섯 권의 소설은 유럽과 미국에서 기대한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아시아에서, 특히 한국에서는 대성공이었다.
폴은 몇 년째 한국인 번역가 경과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경은 일 년에 두 번 파리에 와서 딱 일주일씩 머물다 갔다. 일주일 이상은 절대 머물지 않았다. 폴은 인정하고 싶은 것보다 훨씬 그녀에게 빠져 있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녀 앞에서는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경은 침묵을 좋아했고, 폴은 그 침묵이 싫었다. 폴은 잉크로 채우는 백지처럼, 침묵을 지우기 위해 글을 쓴 건 아닌지 하는 의문이 자주 들었다. 경과 폴은 공항 오가는 걸 포함해 매년 십사 일하고 반나절을 함께 지냈다. 경이 와 있을 때는 몇 시간 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정말 아름다운 건지 아니면 자신의 눈에만 그런 건지 헷갈리지만. 아주 개성 있는 얼굴에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 경과 사랑을 나눌 때는 외계인과 누운 게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폴과 경은 자주 만나지 못하는 이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파리에 있을 때 경이 즐겨 찾는 곳은 아폴리네르 거리의 영화관이었다. 마치 상영하는 영화보다 영화관 자체가 중요한 것 같았다. 그리고 예술의 다리 건너다니길 좋아했고, 한겨울에도 베르티용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프랑스 신문 읽는 걸 좋아하고, 서점을 돌아다니고, 르 마레 지구를 산책하고, 레알 지구의 보행자 전용 도로를 쏘다니고, 벨빌 거리를 굳이 걸어서 올라갔다. 내려가는 것이 더 편한데도. 화창한 날에는 샤프탈 거리의 낭만주의 박물관 정원에서 차를 마셨고, 몽소 거리의 카몽도 박물관에 들르곤 했다. 폴은 집에 들어가는 길에 꽃다발을 사서 경에게 안겼다. 경은 폴의 집 아래층에 있는 반노의 가게에 들어가서 직접 치즈를 골랐고, 폴이 자기를 쳐다보며 탐하는 걸 즐기는 것 같았다. 경은 폴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소설은 두 사람을 묶어주는 끈이었다.
경은 폴의 정신도 장악하고 있었다. 그녀가 파리에 없을 때 훨씬 더 그런 것 같았다. 경은 왜 그토록 매혹적인 걸까? 왜 그토록 그녀가 그리운 걸까?
폴이 원고를 끝내기가 무섭게 어김없이 집에 나타나는 경. 보통은 열한 시간이나 비행기를 타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기 마련인데 경은 장거리 비행이 무색할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 경은 늘 에그 마요와 타르틴, 레모네이드를 섞은 맥주(아마도 시차를 극복하는 특효약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로 점심을 가볍게 먹는데, 한결같이 브르타뉴 거리와 샤를로 거리의 모퉁이에 있는 카페에서 먹었다(르 마르셰에 달걀을 대는 양계장이라도 알아둬야 하나, 이 카페가 문 닫을 경우를 대비해서). 그렇게 점심을 먹은 뒤에 둘은 폴의 집으로 올라갔다. 경이 샤워를 하고 나와 소설을 읽기 위해 폴의 책상 앞에 앉으면, 폴은 침대 발치, 경의 맞은편에 앉아서 지켜봤다. 원고를 읽는 동안은 경이 냉정한 상태이기 때문에 섣부른 행동은 괜한 시간 낭비였다. 소설에 대한 평가에 따라 한국으로 가져갈지 말지 결정하는 것 같았다. 그 결정은 소설 속에 정서적으로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듯했다. 한국에서 오는 저작권료로 먹고사는 폴로서는 소득의 상당 부분이 번역가의 명확한 해석에 달려 있기 때문에 경을 품에 안을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리며 잠자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폴은 외국에 거주하면서 글 쓰는 것이 좋았고, 일 년에 두 번씩 나타나는 경의 방문이 좋았다. 그 나머지 고독한 시간이 이 생활을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였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폴은 벌써 완벽한 새 생활을 찾으려 했으리라.
유리문이 열리는 순간 폴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서가 수하물 카트를 밀고 나오는 사이 로렌이 손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