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함께 살아지다>
누군가가 걷어찬 깡통이, 마침 깡통의 동선을 가로지르던 누군가의 뒤통수를 강타한다. 누군가는 왜 그 깡통을 걷어찼을까? 분명 기분 나쁜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입장에선 우연히 지나가던 사람이 깡통을 맞은 것일 뿐, 맞힐 의도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날아가는 깡통 궤적과의 정확한 타이밍을 준비하며 걷고 있던 사람에게, 나의 사연과 너의 우연을 이해해주길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깡통을 맞은 사람은 왜 하필 그곳을 지나치고 있었을까? 왜라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지나가던 중이었을 뿐이다. 지나가던 사람이 깡통을 찬 사람에게 해명해야 할 일은 아니다. 나름의 사연을 담고 날아오는 깡통이었지만, 지나가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지로 깡통에게 다가간 것이 아닌 그저 우연이다.
그렇다면 깡통을 걷어찬 사람은 왜 기분이 나쁜 상태였을까? 기분이 나쁜 사람의 눈에는 왜 하필 그 순간에 깡통이 보였던 것일까? 조금 늦게 혹은 조금 일찍 깡통을 발견했어도 행인의 머리통을 맞추진 않았을 것이다. 깡통은 왜 하필 거기에 놓여 있었을까? 도대체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이 사건의 정확한 인과가 밝혀질 수 있는 것일까? 어디까지가 우연이고 어디서부터가 필연인 것일까?
니체에 의하면 이 소급의 끝에 드러나는 인식의 한계에서 인간은 신을 만나게 된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우연을 우연으로 내버려 두지 않고 굳이 ‘신’이라는 필연으로 잡아두고자 했던 것이다. 이성의 동물인 인간은 확실한 이유가 찾아져야만 심리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피곤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이유가 찾아지지 않는 경우에는 곧잘 생뚱맞은 가설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다가 그것이 가설이었다는 기억은 잊혀지고, 그것을 원인으로 결론을 증명해내는 순환의 논증이 이어진 인류사였다는 것이 니체의 논증이다.
깡통을 차고 맞은 당사자들은 이 사건에 관여하고 있는 필연의 퍼센테이지에는 관심이 없다. 자신들이 당한 우연을 이해받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불쾌해진 당장의 기분이 중요하다. 추론의 능력과 이해심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반응일 뿐이다. 하여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상식선에서의 사과와 양해를 주고받는다.
현대 사회의 화두인 불확정성, 굳이 현대만으로 범주를 한정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인류에게는 늘 관심의 주제였다. 인간의 삶은 필연으로만 설명되지는 않는다. 어떤 법칙과 원리에 의해 다가오는 결과가 아닌, 삶의 동선을 가로지르던 것과의 공교로운 타이밍일 뿐이었던 결과들로 뒤섞여 있다. 인간 인식의 한계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인과율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우연’이라고 부른다. 우연이 지닌 불확실성은 불안을 잉태했고, 인간은 그 불안을 해결하고자 우연성에 부단히도 필연의 의미를 부여해왔다. 인류의 정신사는 불안에 대한 피임법을 제시하려고 했던 노력으로 잇대어온 시간이기도 하다.
불확정성이란 개념도 인간 입장에서의 일방적인 ‘타협’일 뿐, 신에게는 충분히 확정의 원리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니체는 되묻는다. 그래서 이 미미한 인간들이 그런 성질을 ‘우연’이라고 명명한 것 아니겠냐고…. 그렇다면 이 미미한 인간들이 욕망해야 할 것은, 확실을 보장해줄 긍정론보다는 ‘알 수 없음’ 자체를 긍정하는 겸허함이어야 하지 않겠냐고….
어차피 알고 싶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들도 아닐뿐더러, 이미 반전을 알고 있는 플롯으로 살아가는 인생에 감동과 재미가 허락될 리도 없다. 모름의 상황은 우리의 삶을 보다 역동적으로 만드는 확률이기도 하다. 희망이 실현되면 더 이상 그것을 바라지 않고, 보다 알 수 없는 가능성에 도전하는 우리가 아니던가. 우리의 의지와 행위를 끌어당기는 것들은, 가능성만으로 채워져 있을 뿐, 무엇이 다가올지, 나타날지, 기다리고 있을지를 아직은 알 수 없는 모름의 매력들이다. 그리고 미지로 텅 빈 시간들이 우리의 선택에 따라 다양한 사건들로 분화하면서, 허무와 무기력으로부터 삶을 구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