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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un 18. 2018

09. 파리의 심판과 김치

<슬픈 날엔 샴페인을>




1976년 5월 24일, 미국의 나파 밸리 와인과 프랑스 와인의 블라인드 테이스팅 대회가 영국의 와인상인 스티븐 스퍼리어(Steven Spurrier)의 주관으로 열렸다. 그가 운영하던 파리와인아카데미로 와인을 공부하러 온 미국인들이 나파 밸리의 와인을 가져오곤 했는데 당시 기술이나 품질에서 아직 초보 수준인 미국 와인들이 우수하다고 느낀 스티븐은 같은 품종으로 만든 프랑스 와인과의 맞대결을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해 개최했던 것이다.

심사위원은 프랑스 파리 최고급 레스토랑의 소믈리에, 유명한 와이너리의 소유주, 프랑스 와인 리뷰(The French Wine Review)의 편집자 오데테 칸 등 당시 프랑스 최고의 권위자 9명으로 구성되었고, 20점 만점제였다. 심사는 일반적인 방식과는 다르게 각 분야별로 세분하지 않고 심사위원들이 스스로 자신의 느낌대로 자유롭게 점수를 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화이트 와인에서는 샤도네이 품종으로 만든 나파 밸리산 여섯 가지와 프랑스산 네 가지, 레드 와인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이 주품종인 나파 밸리의 여섯 가지와 프랑스 보르도의 최고급 네 가지가 출품되었다. 대회를 개최한 스티븐도 다른 심사위원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와인이 프랑스 와인을 이길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화이트 와인에서는 나파 밸리의 ‘73년산 샤토 몬텔레나(Chateau Montelena)가 일등을 차지했고, 레드 와인에서도 나파 밸리의 스택스 립 와인 셀라의 ‘73년산이 일등을 차지했던 것이다. 당시 3년 된 포도나무에서 처음 만든 와인이었다. 이 대결의 결과는 당시 타임지의 프랑스 특파원인 영국인 조지 테이버에 의해 전 세계로 타전되었다. 그도 미국 와인이 이길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고 한다. 당시의 뉴스 헤드라인은 ‘파리에서 총소리가 울리다’였고, 사람들은 그 사건을 ‘파리의 심판(The Judgment of Paris)’이라고 불렀다.

프랑스 와인업계의 대표자들은 분노했다. 절대 하수로부터 뜻밖의 강력한 펀치를 맞은 셈이다. 그것은 위대한 프랑스 와인에 대한 하극상이자 도전이었고, 세상 사람들에게 프랑스 와인만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와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프랑스 와인협회는 그 대회를 주관한 스티븐을 일 년 동안 모든 와인행사의 초대자 명단에서 제외시켰다. 또 프랑스의 권위 있는 일간지인 르 피가로(Le Pigaro)지와 르 몽드(Le Monde)지에서는 이 사건 자체를 아예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난 뒤에야 두 신문 모두가 그저 웃고 넘길 만한 사건이었다고 가볍게 보도하고 넘어갔다.


1976년 시음대회에서 패배를 당했던 프랑스인들은 나파 밸리 와인의 우수성은 인정했지만 미국 와인은 역사가 짧아서 제대로 숙성이 된 와인을 만들어본 경험도 없는 반면에 프랑스 와인은 세월이 흐를수록 원숙하고 훌륭해진다는 주장을 꾸준히 제기해왔다. 많은 전문가들도 그들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의 강변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프랑스 와인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그 당시에 사용되었던 것과 똑같은 와인으로 다시 2차 대회를 열었다. 이번에는 캘리포니아의 나파 밸리에 있는 코피아센터와 영국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숍 두 곳에서 동시에 미국, 영국, 프랑스의 와인전문가들을 선정해서 처음 대회가 열린 날로부터 정확히 30년이 지난 2006년 5월 24일에 진행되었다.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온 결과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캘리포니아의 71년산 릿지 몬테 벨로(Ridge Monte Bello)의 카베르네 소비뇽이 1등을 차지했던 것이다. 게다가 2등에서 5등까지도 모조리 나파 밸리의 와인들이 휩쓸어 버렸다. 프랑스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숭배받던 위대한 보르도 와인들은 6등에서 9등을 차지했다. 그리고 10등은 다시 나파 밸리 와인이 차지함으로써 ‘캘리포니아 와인은 미숙하다.’고 부르짖었던 프랑스인들의 입을 틀어막았고 그들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의 나파 밸리 와인은 수억 달러의 선전비를 들이지 않고도 화려하고 당당하게 국제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다. 나파의 와인들은 그 뒤에 열린 여러 다른 기관의 블라인드 테이스팅 대회에서도 프랑스 와인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여러 차례 입증했다. 세계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 와인이 프랑스 와인보다 무조건 더 우수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프랑스가 와인의 종주국이라면 한국은 김치의 종주국이다. 만일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한국에서 제일 맛있는 김치 몇 가지와 미국에서 만든 제일 맛있다는 김치의 맞대결을 펼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농사짓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캘리포니아에서 생산되는 배추는 최상급이다. 크고 달고 싱싱한 데다 씹히는 질감까지 좋다. 배추만이 아니라 상추, 고추, 파, 마늘, 양파 등 김치에 들어가는 온갖 재료들의 품질이 모두 세계 최고다. 완벽한 기후와 토양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음식은 재료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 때문에 캘리포니아 산 김치와 한국산 김치가 맞대결을 펼쳤을 때 캘리포니아 산 김치가 일등을 차지할 수도 있다는 상상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김치가 결코 따라올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한국의 김치만이 가지고 있는 다양함, 지방마다 다른 김치의 특성, 그리고 역사와 문화와 자긍심이다. 한국은 거의 모든 지방에서 자기들만의 특색 있는 김치를 만들어왔고 조상 대대로 이어온 숨결을 지니고 있다. 미국에서 아무리 김치를 잘 만들어낸다 해도 한국의 김치가 가지고 있는 역사와 콘텐츠는 따라갈 수가 없다. 미국과 프랑스의 와인 대회도 마찬가지다.


미국 와인의 우수성을 다시 한 번 입증한 나파 밸리의 와인들에게 큰 박수를 보내며 훌륭한 와인을 만들기 위한 미국인들의 인내와 과학적인 접근 방식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2천 년 이상의 역사를 통해 훌륭한 와인을 빚어온 프랑스 와인에도 변치 않는 애정과 존경을 보낸다. 그 대회에서 캘리포니아 와인에게 상위를 모두 내주었지만 프랑스 와인만이 가지고 있는 다양함과 역사, 그리고 문화적 가치는 캘리포니아가 매우 오랫동안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일등과 이등의 맛의 차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 그 차이는 사실 미미하며 각자의 입맛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실제로 당시 심사위원들이 매긴 일 등부터 십 등까지의 점수도 매우 근소한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김치를 먹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김치가 있어서 행복한 것처럼 어느 와인이 조금 더 맛있느냐를 따지는 것은 흥미롭긴 하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다. 와인은 그저 우리 인생을 보다 풍요롭게 해주는 하나의 음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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