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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취미미술, 어디까지 해봤니

<회사 그만두고 유학을 갑니다>

by 더굿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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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휴가엔 어디로 가세요?”

회사에서 사람들과 같이 점심을 먹다가 휴가 주제를 꺼내면 갑자기 분위기가 환해졌다. 휴가를 한 번에 며칠을 몰아서 쓸 수 있는지 들으면 그 팀의 분위기가 대충 짐작이 되고 어디로 가고 싶은지 목적지를 들으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휴가가 5일밖에 안 되는데 공휴일을 뒤에 끼고 앞에 주말을 붙여서 어떻게든 쿠바로 떠나겠다는 사람은 여행에서 겪는 고생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유형이다. 쿠바까지 적어도 20시간은 걸리니, 되도록 이곳을 멀리 떠나 현실을 잊고 싶은 상황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휴가가 똑같이 5일인데 동남아의 어느 휴양지 유명 리조트에서 쉬고 싶어 할 수도 있다. 경험상 이런 유형은 본인이 가고 싶은 휴가라기보다 가족이나 누군가의 요청에 의해 잡힌 일정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해외여행과 별로 안 친한 사람도 있다. 휴가를 쓸 수 있으면 집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드라마를 몰아보면서 배달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실컷 잠이나 자고 싶다는 유형이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행기 표를 사는 그 순간 어쩔 줄 모르는 기쁨에 사로잡힌다. 나 역시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거의 1년 치 해외여행 계획을 미리 짜놓고, 일상이 지겹거나 우울할 때 비행기 표를 검색하곤 했다. 황금연휴는 물론이고 일본이나 홍콩, 동남아는 밤 비행기 표를 이용해 1박 3일, 2박 4일 같은 무지막지한 스케줄을 흔쾌히 감당하며 떠나기도 했다.

몇 년간 그렇게 달콤한 휴가만을 바라보며 살아보니 일상은 지옥처럼, 여행은 천국처럼 느껴졌다. 우연히 상상 속 유니콘 같은 존재인 북유럽에 사는 친구를 만나면 여행의 좋은 기억을 풀어놓으며 부럽다는 말을 반복했다. 친구는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겹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야, 거기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여행지에서 그렸고 지하철에 앉아서 보이거나 생각나는 것을 그렸다. 짧은 선이 쌓여 스케치북이 되고 깡통은 점점 채워졌다. 나에겐 작은 목표가 생겼다. 최대한 많은 깡통을 만들어 채우는 것.


취미미술, 어디까지 해봤니 ―
무엇을 어떻게 그릴지 배울 수 있을까?

미대를 나오지 않은 사람이 뒤늦게 미술에 관심을 가지면 가장 먼저 문을 두드리는 곳은 취미미술학원이다. 요즘엔 그래도 더 자유로운 드로잉 모임도 많이 생겼지만 어떤 것부터 해야 할지 모를 때는 뭔가 정석대로 가르쳐줄 것 같은 학원에 조금 더 신뢰가 가게 마련.

연필이나 펜은 쉽게 접하고 쓸 수 있지만 수채화, 오일파스텔, 아크릴 같은 다른 재료가 써보고 싶어 화방에 혼자 들어갔다가 당황해서 황급히 빠져나오기도 했다. 어렵게 재료를 구하고 나니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몰랐다. 물어볼 사람도 없었고 인터넷만 검색하다 포기했다.

친구가 한 미술학원을 추천했다. 색연필로 그린 예쁜 그림을 보여줬는데 자신이 그렸다며 어떠냐고 물었다. 친구의 성격처럼 꼼꼼하고 부드러웠다. 꽤 오랜 시간 공들여 그린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렸는지 물으니 친구는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선생님이 그린 작품을 보고 똑같이 따라 그리면 된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색연필의 특성을 익힐 수 있고 그림이 예쁘니 마음에 든다고 했다. 혼자 그리면 자주 망치는데 화실에서 그리면 선생님이 계속 봐주니 틀릴 걱정은 없다고 했다. 너도 그림 좋아하잖아. 같이 다닐래?

꽤 오래 고민하다 거절했다. 거리가 멀다는 핑계를 댔지만 솔직히 나는 색연필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잘 모르는 것을 물어볼 곳이 있다는 점이 끌렸다. 다시 검색해서 문화센터에서 하는 미술수업을 신청했다. 반짝거리는 구두나 울퉁불퉁한 나무토막의 질감을 표현하고 옆에 앉은 다른 학생을 그리기도 하면서 즐거웠다. 8주가 지났을 때 선생님에게 찾아가서 미술을 계속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화실에 오라며 연락처를 줬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그리고 싶은 걸 그릴 수 있어요.

화실은 문화센터보다 사람이 훨씬 적고 언뜻 개인적인 공간으로 보였다. 구두나 나무토막같이 보고 그릴 만한 사물이 없어 두리번대고 있는 나에게 선생님이 명화 모음집을 가져다줬다. 그리고 싶은 명화를 고르고 최대한 비슷하게 목탄이나 파스텔로 표현하면 된다고 했다. 나는 왜 명화를 따라 그려야 하는지 물었다. 재료의 특성과 색, 구성 등 다양한 그림의 요소를 가장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는 방법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두운 색부터 깔고 시작한다, 원색을 그대로 쓰지 말고 회색이나 미색이 섞여야 한다, 마무리에 시간을 많이 쓰고 가장 밝은 하이라이트는 최종적으로 해야 한다 등 많은 법칙이 빠르게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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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연필 그림을 보여줬던 친구는 더 이상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고 했다. 내 그림을 보더니 반가워했다. “앗, 나도 이 그림 알아! 나도 만약 계속 학원을 다녔으면 아마 파스텔 코스로 넘어갔을 거야. 진짜 비슷하게 그렸다!” 그림은 점점 비슷해졌지만 내 그림이 아니었다. 진짜 내 그림은 언제 그릴 수 있을까. 명화를 한동안 그리다가 사진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들, 누군가 잘 찍은 사진이 주로 대상이 되었다. 사진의 구도대로 스케치를 하다 짜증이 났다. 이건 사진이잖아. 왜 사진을 똑같이 베끼듯 그려야 하는 거지? 그리고 미술이 그림만 있는 건 아니잖아. 다른 건 어디서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순수미술을 전공한 친구를 붙잡고 하소연하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취미미술은 원래 그래. 아니면 유학을 가든지. 외국에선 따라 그리기 안 시켜.”

한국에서 취미로 미술을 즐기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분위기 좋고 커피 향 가득한 장소에서 사람들과 떠들며 서로의 그림을 칭찬하고 여유로운 주말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하지만 난 그 어디에서도 충분히 배운다는 만족감을 가질 수 없었다. 미대를 나온 친구 A의 작품은 ‘체험 삶의 현장’인데 내 그림은 ‘문화가 소식’처럼 느껴졌다. A는 출근하듯 정해진 시간에 작업을 시작하고 내가 기획서를 쓰는 것처럼 스스로 목표를 만들고 내가 업무 미팅하듯 작가들을 만났다. A의 삶에는 이미 예술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나는 그저 주말을 조금 더 재미있게 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취미미술이 잘못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만족할 수 없는데 다른 대안이 없었던 게 아쉬웠다. 예술을 취미의 연장선 어디쯤에 두는 것과 삶에 끌어들여 함께 살아가고 있는 건 어떤 차이가 있을까 궁금했다. 나에게 다른 대안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더 적극적으로 찾아보지 않았던 내가 잘못한 건지 아니면 취미미술, 전공, 유학미술을 구분 짓는 선이 어딘가에서 나를 걸고넘어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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