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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ul 13. 2018

08. 향기로운 80세 할머니의 일상

<우리가 만날 때마다 무심코 던지는 말들>




“얘! 일어났니? 정원에 꽃들이 예쁘게 피었어. 새들이 날아와서 지저귀고 있지 뭐니?”

아침이 열리기도 전에 화초에 물을 주면서 전화로 딸을 깨우는 80세 할머니의 초롱초롱한 말이다. 오히려 졸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50대 딸의 목소리가 더 나이 들어 보인다.

“아휴, 못살아. 엄마 나 졸려. 이따가 정신 차리고 전화할게요.”

나이가 들수록 새벽잠이 없어진다고 하지만 80세 할머니의 일상은 이렇게 꽃과 새와 새벽 공기와 함께 열린다. 또 하나의 깜짝 이야기이다.

“언니! 어머니가 또 등록하셨어요.”
“뭐? 또 등록했다고? 못 말린다니까.”

지역 문화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후배가 서울에 사는 할머니의 딸에게 고자질하면서 주고받는 대화다. 할머니가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문화센터에 또 등록했다는 것이다. 영어를 배운다고 해서 80세 할머니가 영어를 크게 써먹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할머니가 문화센터에 등록하는 이유는 뭘까?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란다.

“할머니! 다음 학기에도 등록하실 거죠?”
“그럴까?”

할머니와 영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재등록’, ‘재재등록’을 부추긴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할머니가 젊은 사람들과 함께할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어서다.

“오늘은 내가 커피 한 잔 쏠게요.”
“야호! 좋습니다. 할머니 최고!”

문화센터의 동료들은 환호한다. 현장의 분위기로는 ‘왕언니! 최고!’일 듯싶다. 점입가경. 이 할머니가 커피를 사는 곳은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아니라 핸드드립을 하는 커피 전문점이다. 젊은 동료들은 커피 향에 취하고, 할머니의 수준에 놀란다. 사람들은 늘 커피숍에서 ‘뭘 시킬까?’를 고민한다. 대체로 가장 쉬운 ‘아메리카노’, 하지만 할머니가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이다.

“지난번에 예가체프가 맛이 있던데, 다들 하나씩 골라 봐요.”

이쯤 되면 좌중은 입이 딱 벌어진다. 80세 할머니의 입에서 젊은 사람들도 알기 쉽지 않은 에티오피아의 ‘예가체프’가 나왔으니 말이다. 이 커피는 에티오피아의 이르가체페에서 나오는 고급 커피다. 할머니는 커피에 대한 설명을 곁들인다.

“이 커피는 ‘커피의 귀부인’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을 정도로 세련된 맛을 지니고 있다고 해요.”

영어 클래스가 갑자기 커피 교실로 바뀐 듯한 분위기. 할머니의 인기는 상종가로 치닫는다.

이 할머니는 바리스타 자격증을 가진 딸을 따라서 커피 전문점에 가끔 간다. 그때마다 커피의 종류를 냅킨에 메모해서 잊지 않도록 한다. 다음에 누군가와 같이 오면 폼 나게 주문을 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자세는 품격을 높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80세쯤 되면 ‘커피가 몸에 해롭다느니’, ‘밤에 잠을 못 자서 안 마신다느니’ 여러 가지 구실이 등장하지만 이 할머니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항상 신선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식당에 가는 것도 그렇다. 된장찌개, 순두부가 아니라 “스파게티 먹으러 갑시다” 하며 톡톡 튀는 멘트를 던진다. 그러니 젊은 사람들이 이 할머니가 빠지면 재미가 없다며 자꾸만 재등록을 부추기는 것이다. 병원을 갈 때도 할머니는 자식들을 괴롭히지 않고 혼자서 해결한다. 단골 택시 운전사가 할머니의 병원 예약날짜에 맞춰서 집 앞에 차를 대고 ‘빵빵’ 클랙슨을 울린다. 운전사에게 어느 정도의 수고비가 얹히는 것도 있겠지만, 정이 담긴 언행이 있어서다. 운전사는 할머니를 병원에 내려놓고 줄행랑을 치는 것이 아니라 진찰 수속까지 다 해 준단다. 요즘 운전사들에게 ‘갑질’하는 사람들보다는 이 할머니가 훨씬 품격이 있어 보인다. 집 앞에서 수도관 공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시끄럽다’고 투정 부리는 대신 음료수를 제공한다. 그것도 스트로를 꼽아서. 가족 모임에서도 할머니가 주빈 석에 앉는다. 어른이니까 당연하겠지만, 영국의 여왕처럼 우아한 모자와 스카프로 코디를 해서 호텔 레스토랑 분위기를 리드하기 때문이다.



이태리의 사회학자 프란체스코 알베로니는 “영혼이 가난하고 편협한 사람은 자신의 목표만을 바라본다”면서 “고귀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이는 것을 원한다”고 했다. 이 할머니의 주변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것은 영혼이 고귀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를 먹고 늙어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다고…” 하면서 시곗바늘을 따라 속절없이 흘러가는 것보다는, 스스로 일상을 밝게 열어 가는 얼룩 없는 삶이 향기로워 보인다. 봄꽃의 향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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