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의 기술>
“사람은 뚜렷한 목표를 갖고 살아야 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좋은 조언이다. 우리는 그런 수준에선 목표의 필요성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목표’가 삶의 지향성 수준을 넘어서 성공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강조되면서 좀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미국의 한 자기계발 전도사는 “목표는 성취라는 용광로 속의 연료이다”라고 주장했는데, 이런 목표론의 원조는 미국의 시인이자 외교관이었던 제임스 러셀 로웰(James Russell Lowell, 1819~1891)이다. 그의 시와 명언은 성공 열망을 예찬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까지도 미국 학생들은 로웰의 시를 공책에 베껴 쓴다는데, 그가 남긴 명언 중 하나는 “실패가 아니라 낮은 목표가 수치스러운 것이다”이다.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란 미국인의 4분의 3이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 대부분은 사회 체계를 탓해선 안 되고 스스로를 탓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로웰의 명언이 시사하듯이, 낮은 목표는 수치스러운 것이므로 목표라는 말엔 이미 ‘높은 목표’라는 뜻이 내장되어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 목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전도사는 경영 컨설턴트 브라이언 트레이시(Brian Tracy)다.
트레이시는 “명확한 목표 없이 살아가는 것은 짙은 안갯속에서 운전을 하는 것과 같다”며 “명확한 목표만 있다면 삶의 가속페달을 밟고 빠르게 앞으로 달려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목표가 그렇게 좋은 것이라는데, 왜 사람들은 트레이시가 역설하는 종류의 목표 없이 살아가는 걸까? 트레이시는 ‘사람들이 목표를 설정하지 않는 이유’를 네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사람들은 대부분 목표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고 있다.
둘째, 사람들은 대부분 목표를 설정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
자신이 이미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기껏해야 “행복해지고 싶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 식의 소망이나 꿈을 목표로 착각한다.
셋째,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실패할 것 같은 목표는 아예 설정하지 않는다.
넷째, 목표를 설정하고서도 성공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거나 조롱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꽤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다른 의견도 있다. 스티븐 샤피로(Stephen M. Shapiro)는 정반대로 ‘목표 없는 삶’을 찬양한다. ‘목표 없는 삶’은 미래의 목표보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삶을 뜻한다. 샤피로는 목표에 집착하는 삶은 출구 없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인생행로에는 선택할 갈림길이 많기 때문에 언제든 방향을 바꾸는 유연한 자세로 현재에 집중하면 오히려 기적 같은 삶이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이다.
뭐 그렇게 썩 가슴에 와닿진 않지만, 사실 문제는 어떤 목표냐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것도 목표라면 목표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는 목표는 낮고 작은 것인 반면, 먼 미래를 내다볼수록 목표는 높고 크기 마련이며 도달하기도 힘들다.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와 관련된 ‘본질적 목표’냐, 돈과 권력 등과 같은 외부적 동기로 채워진 ‘비본질적 목표’냐 하는 것도 따져볼 문제다. 대부분의 자기계발서들이 말하는 목표는 후자인데, 왜 목표의 범주를 그렇게 좁혀야 하는지 의문이다. 그런 비본질적 목표라 하더라도 목표가 왜 그렇게 높고 커야만 하는 건지 그것 역시 의문이다.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도달하기 힘든 목표는 불만족스러운 삶을 만드는 비결”이라고 말한다. 롤프 도벨리(Rolf Dobelli)도 “비현실적인 목표는 행복을 망치는 주범이다”며 이런 타협책을 제시한다.
“당신의 목표를 의식적으로 약간 모호하게 표현하라(가령 억만장자가 되겠다고 하는 대신 돈을 많이 벌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목표에 도달하면 정말 훌륭한 일이고, 그러지 못했다 해도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목표를 이룬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벨리의 타협책은 이미 트레이시가 반박한 바 있다. 소망이나 꿈은 목표가 아니라고 말이다. 목표를 강조하는 주장에 진지하게 반론을 펴기보다는 찰스 슐츠(Charles Schulz, 1922~2000)의 다음과 같은 농반진반(弄半眞半)의 말이 어떨까 싶다.
“내 인생은 목적도, 방향도, 목표도, 의미도 없지만 난 행복하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나도 모르겠다.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높고, 뚜렷한 목표 때문에 성공한 사람도 많지만, 그런 목표의 노예가 된 나머지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건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도 많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자주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저 정도 가졌으면 굳이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서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왜 저런 거지?”
목표가 없는 한심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모두 다 그럴 필요는 없지만, 목표 없이 사는 삶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이 많아져야 평온한 사회로 한 걸음 나아가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