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의 기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특히 방송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손석희의 뉴스 클로징 멘트기도 하다. 뭐 그냥 예의 차원에서 하는 말이거나 공적 사명감을 다짐하기 위해 하는 말이라면 무방하거니와 아름답지만, 이 말을 자신의 인생 슬로건으로 삼고 철저히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웨인 다이어(Wayne W. Dyer)는 “최선을 다하라!”는 성취 노이로제의 슬로건이라며, 이렇게 묻는다. “살아가면서 어떤 일들은 죽을힘을 다해서가 아니라 그냥 하면 안 되는 걸까?” 그가 내놓은 답은 “최선을 다하라”를 그냥 “하라”로 바꿔보자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라”는 완벽주의적인 말은 우리를 잔뜩 움츠러들게 해 도무지 어떤 것도 시도해볼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완벽주의로 보는 것엔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지만, 둘 사이에 상당한 관련성이 있다는 건 분명하다. 완벽주의, 그거 정말 골치 아프다. 어느 조직에서건 빈틈이 없는 완벽주의자는 정이 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몹시 괴롭게 만든다. 심지어 가정에서도 가장이 완벽주의자면 배우자와 자식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는다.
완벽주의(perfectionism)의 뿌리는 멀리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그게 대중화되기 시작한 중요한 변곡점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탄생 과정이다. 미국의 탄생 이전 유럽인은 인간이 가진 숙명적인 불완전성 때문에 이미 도달할 수 있는 한계치에 가까워졌다고 믿고 있었지만, 신대륙으로 이주해간 미국인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인간이 좀 더 나은 곳을 향해 계속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바로 그런 역사의 유산 때문에 오늘날 미국인들은 ‘완벽한(perfect)’이라는 단어를 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즐겨 쓴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한국인이 보기엔 날씨가 그리 좋지 않은데도 미국인의 입에선 “완벽한 날씨네(It’s a perfect weather)”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온다.
미국과 프랑스의 문화 차이 탓일까?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완벽은 좋은 것의 적(Perfect is the enemy of the good)”이라고 했다. 완벽이나 최고보다는 보통 수준의 ‘good’이 낫다는 의미다.
볼테르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겠지만, 미국 경제학자이자 심리학자인 허버트 사이먼(Herbert A. Simon, 1916~2001)은 만족(satisfy)과 희생(sacrifice)을 합해 satisfice란 말을 만들었는데, 이는 인간이 주어진 조건의 제약에서 적당히 희생할 것은 희생하고 취할 것은 취하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신고전주의 학파의 주장처럼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선택(satisfice)’, 즉 ‘그만하면 괜찮은(good enough)’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게 사이먼의 주장이다.
늘 최선의 선택에 골몰하는 완벽주의자의 행태는 쇼핑에서도 잘 드러난다. 배리 슈워츠(Barry Schwartz)는 최고만을 추구하는 ‘최선 추구자(maximizer)’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비참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며, 그 대안으로 ‘만족 추구자(satisfier)’ 모델을 제시한다.
만족 추구자는 나름의 기준과 표준을 갖고 있기에 그걸 충족시킬 때까지만 탐색을 하며, 그 시점이 되면 탐색을 중단한다. 예컨대, 만족 추구자는 자신이 갖고 있는 기준의 크기, 품질, 가격에 맞는 스웨터를 발견하면, 더는 가게를 둘러보지 않고 그것을 구매한다는 것이다.
학자들이 쇼핑 만족도 조사를 해보았더니, 최선 추구자가 가격과 품질에선 더 나은 판단을 내렸지만, 주관적인 만족도는 만족추구자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자기 결정에 대한 기대가 그리 높지 않고 최선 추구자처럼 항상 더 나은 선택을 놓쳤다는 느낌에 시달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자기계발서들은 사람들에게 완벽주의를 삶의 지침으로 삼으라고 권한다. 올리버 버크먼(Oliver Burkeman)은 『행복 중독자』에서 ‘우리를 숨 막히게 하는 완벽주의’를 낱낱이 고발한다. “단기간에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책들은 한결같이 완벽주의(약간의 개선 정도가 아닌 완벽한 변화를 요구하는)를 내세우고 있다.”
그 어떤 완벽주의자도 모든 면에서 완벽주의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각자 전공이 있다고나 할까? 우리가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가장 많이 접한 완벽주의는 아마도 ‘청결 완벽주의’일게다. 우선 당장 청결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 서장훈이 떠오른다. 자신도 느끼고 있겠지만, 청결 완벽주의는 이만저만 피곤한 게 아니다.
호르스트 코넨(Horst Conen)은 집 안 정리의 강박이 있는 사람에게 “의식적으로 카오스 상태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견뎌본다. 있는 그대로 14일간을 견뎌보자”라는 해법을 제시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한 요구다. 서장훈이 그걸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일을 포함해 다방면에 걸쳐서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앤 라모트(Anne Lamott)는 “완벽주의는 우리를 숨 막히게 하고, 그 탓에 결국 우리의 인생 전체가 망가지게 될 것이다”고 단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완벽주의는 땅을 보며 극도로 조심해서 걸으면, 장애물에 걸려 사고로 죽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사고에 기초하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은 죽는다. 그리고 보통은 땅만 바라보고 걷는 강박증 환자보다 땅을 바라보지 않고 걷는 사람들이 훨씬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간다. 또한 앞에 펼쳐진 다양한 경치를 바라보며 더욱 즐겁게 살아간다.”
완벽주의를 완벽하게 극복할 수 없다면, 일종의 타협책을 시도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탈 벤-샤하르(Tal Ben-Shahar)가 권하는 방법은 이른바 ‘선택과 집중’이다. 그는 대학생 시절 첫 2년 동안 모든 과제와 시험에 똑같은 시간을 투자하는 완벽주의의 문제를 절감한 뒤, 과제를 대충 훑어본 다음 ‘시간 비용 대비 효과가 가장 크다’고 판단되는 20퍼센트를 집중적으로 공부해 큰 도움을 얻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번 시간을 스포츠, 대중 연설, 교우 활동 등에 투자해 행복해졌을 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로 보더라도 성공적인 시기를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완벽주의가 생기는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늘 자신을 남과 비교하면서 주변 사람들이나 사회에서 항상 높은 목표와 완벽, 최선을 당연하게 강요받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긴 완벽주의를 ‘사회적으로 처방된 완벽주의(socially prescribed perfectionism)’라고 한다.
일본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岸見一郎)와 작가 고가 후미타케(古賀史健)의 『미움받을 용기』가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남과의 비교에 능한 한국인에게 가장 필요한 건 ‘미움받을 용기’라기 보다는 ‘비교하지 않는 용기’가 아닐까?
더불어 필요한 것은 겸손한 마음이다. 따지고 보면 완벽주의란 자만이나 오만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높은 기준을 자신은 충족시킬 수 있으며 충족시켜야 한다고 자신을 못살게 구는 건 그 바탕에 남들을 낮춰 보거나 무시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 1934~2016)이 노래한 다음 메시지를 음미해보는 게 어떨까?
“뭐든 틈이 있어요. 그래야 빛이 들어오죠.(There’s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