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의 기술>
체념은 좋고 포기는 나쁜가? 그렇지 않다. 체념은 포기를 하는 심적 상태에 초점을 맞춘 것일 뿐 포기 역시 얼마든지 바람직한 것일 수 있다. 아니 굳이 구분을 하자면 체념과 포기는 다르다는 것일 뿐, 우리는 실제 생활에선 포기를 체념의 의미로 쓰기도 한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겠다.
사실 누구나 다 포기를 하면서 살아간다. 대통령도 포기하고, 재벌 총수도 포기한다.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사람이 성공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 좀 많은가. 누구나 다 수긍할 것이다. 즉, 무엇을 포기하느냐의 차이일 뿐인데, 우리는 그런 구분조차 없이 “성공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는 건 나쁘다”는 말을 그냥 포기에 대한 부정으로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왜 그래야 하나? 그리 비싸지도 않은 상품을 하나 살 때에도 꼼꼼하게 따져보면서 왜 포기에 대해선 그렇게 허술하게 굴어야 한단 말인가? 혹 포기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감은 포기를 비난하고 저주하는 대규모 선전 공세에 우리가 굴복했거나 주눅이든 탓은 아닌가?
『포기하지 마라 한 번뿐인 인생이다』. 『꿈!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 『포기 대신 죽기 살기로』.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 『포기하지 말자 인생이 아름다워진다』. 『포기하지 마, 1%의 가능성만 있다면』. 『꿈꾸는 자는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괜찮아, 좌절하고 방황해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포기하지 마! 넌 최고가 될 거야』. 『포기하는 자 머슴으로 살고 도전하는 자 주인으로 산다』. 『포기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포기하지 말라고 권하는 책 제목들이다. 어디 책뿐인가. 어느 분야에서건 성공 좀 했다는 사람치고 포기를 저주하는 명언을 남기지 않은 이가 드물 정도다. 영화와 드라마 등의 대중문화는 물론 언론도 포기하지 말라며 사실상 포기를 비판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삼고 있다.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는 대중문화와 언론의 주요 양식인데, 이런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성공의 주인공들이 포기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어려움을 이겨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물론 포기를 비판한다고 해서 모두 다 같은 종류의 이야기는 아니다. 포기를 비판하는 메시지엔 고난과 역경에 굴복하지 말라는 방어적 메시지와 꿈과 야망을 위해 싸우라는 공세적 메시지라는 두 종류가 있다. 예컨대, 중병에 걸린 사람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는 건 방어적 메시지지만, 야망의 실현을 위해 포기하지 말하고 말하는 건 공세적 메시지다. 꿈과 야망의 실현을 위해 고난과 역경에 굴복하지 말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포기의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포기해선 안 될 것이 있는가 하면 포기가 바람직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적 언어생활에선 이 두 가지가 구분되지 않은 채로 “포기는 무조건 어리석거나 나쁘다”는 식의 포기 부정론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의 압축 성장 과정에서 “하면 된다”는 슬로건이 우리의 삶을 지배해왔으며, 고성장이 그런 슬로건의 타당성을 꽤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 고성장의 시대는 지나갔지만, 그 시절에 형성된 포기 부정론은 여전히 건재하다.
고성장 시대의 종언은 우리에게 꿈의 높이를 낮추거나 욕망의 일부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삶의 지혜를 요구하고 있지만, 그런 포기 긍정론은 찾아보기 어렵다. 많은 사람이 포기 긍정론에 내심 동의하면서도 공론장에선 포기 긍정론이 잘 유통되지 않는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포기를 긍정하면 ‘루저’로 간주되기 십상이고 그런 사람의 사회적 영향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둘째, 자신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사람이 포기 긍정론을 역설하면 욕먹기 십상이어서 감히 입을 열기 어렵기 때문이다. ‘포기하라’고 해도 욕먹고 ‘노력하라’고 해도 욕먹으니 입 닫고 있는 게 상책이다.
포기를 긍정하건 부정하건 그건 어차피 시장 논리에 따라 결정될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처럼 남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는 전형적인 타인지향적 사회에선 그런 일은 일어나기 어렵다. 성공의 가능성이 매우 희박함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전투적 삶으로 스스로 자신을 못살게 굴면서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일이 지속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이런 삶의 자세가 모든 걸 획일적 잣대로 서열화하는 비극을 지속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체제하에서 포기란 가능하지 않으며,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서열 사회가 지속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이젠 포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포기를 긍정하는 삶이 뿌리를 내리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우선 언론부터 포기 부정론 일변도의 기사 생산 방식을 의심해보는 게 좋겠다.
포기가 큰 도덕적 흠결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어대는 사회에서 한 개인이 포기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판단하긴 어렵지만, 포기에 대한 비판과 비난은 기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암묵적 음모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깨달을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이 서열화된 피라미드 구조에서 경쟁의 수혜는 상층부의 극소수에게만 돌아가지만, 이 시스템이 공정하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선 결과적으로 들러리를 서주는 사람들의 존재가 필요한 법이다. 이 사람들은 기존 시스템의 원초적 불공정성을 문제 삼기보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사실상 그 시스템을 떠받쳐주는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시스템의 개혁은 영영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포기를 하면 ‘의지박약’이라는 비판을 들을까 봐 무서워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우리는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을 의지박약이라고 하지만, ‘해야 할 것’이라는 애초의 전제가 잘못되었다면, 오히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계속하는 것이 의지박약일 수 있다. 사실 나는 포기하고 싶은데 남들의 시선이 두려워 끌려다니는 것, 이게 바로 의지박약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언제 포기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의지박약”이라는 줄리언 바지니(Jukian Baggini)의 주장엔 일리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앤 랜더스(Ann Landers)의 다음과 같은 조언도 포기를 의지박약으로 보는 건 어리석은 생각일 수 있다는 걸 말해준다. “어떤 사람들은 꼭 붙잡고 버티는 것이 위대한 힘의 상징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언제 손을 놓아야 할지 알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데에 훨씬 더 큰 힘이 필요할 때가 있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포기를 긍정하는 삶을 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매우 현실적인 해법으로 이른바 ‘전략적 포기’는 어떤가? 전략적 포기는 기업이 경영 전략으로 써먹는 방법이지만, 배울 점은 있다.
잭 웰치(Jack Welch)는 “우리가 어떤 분야에서 1등이나 2등이 될 수 없다면 그 사업은 포기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사업을 포기하지 않으면 경영진의 집중력을 흩트려 놓고, 자원・자본・주의력・에너지를 집어삼키고, 구성원들에게 세계 최고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불어넣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략적 포기는 꼭 1, 2등이 되는 것을 겨냥하지 않더라도 냉정하게 이해득실을 따져서 하는 포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세스 고딘(Seth Godin)은 “전략적 포기란 당신이 주어진 선택의 범위 내에서 내리는 의식적인 결정이다”며 “‘포기’가 ‘그럭저럭 대처하기’보다 나은 이유는, 무언가 다른 일에서 남보다 탁월하게 될 기회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이 주장에서 ‘남보다 탁월하게 될 기회’만 당신에게 어울리는 말, 또는 당신이 진정 원하는 것으로 바꾼다면, 전략적 포기는 훌륭한 대안이다.
성공과 평온은 결코 좋은 사이는 아니다.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다. 이건 성공 여부와 정도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다 해당되는 이치다. 포기했기 때문에 행복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 귀에 잘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는 것이 곧 행복에 가까워지는 길은 아니다. 포기를 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다수를 들러리로 세워 자신들의 특권을 정당화하는 기존 시스템은 무너지게 되어 있지만, 우선 나 자신의 평온을 위해 포기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포기하지 마라 한 번뿐인 인생이다”는 얼마든지 “포기하라 한 번뿐인 인생이다”로 바꿔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