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엄마랑 아들이 카우치 서핑을 찾는다니 흥미롭다는데요?”
엄마를 동반한 아들을 반기는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 기대하지 말라던 아들은 뜻밖의 초청을 받고 고민스러운 듯 나를 바라본다. 스코틀랜드에 오기 전, 아들은 나의 성화에 못 이겨 여러 군데 카우치 서핑을 신청했다. 나는 카우치 서핑을 통하여 현지인들의 삶을 체험하고 싶었다.
카우치 서핑이란 여행자가 잠 잘 수 있는 ‘소파를 찾아다닌다’는 뜻으로 현지인이 여행자들을 위해 자신의 숙소를 제공하는 인터넷 여행자 커뮤니티를 말한다. 회원들은 자신의 여행 목적을 소개하는 이메일을 가고자 하는 여행지의 회원에게 보내어 호스팅을 요청한다. 서로 댓글을 통해 평점을 매기며 신뢰도를 구축하기에 사전에 호스팅 상대에 대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그 정보에 의하면 제프는 친교보다는 집만 개방하는 자유 스타일이었다. 문화적 교류를 원하는 우리의 입장과 달랐다. 그러나 나는 다섯 통의 이메일 요청 끝에 받은 단 한 건의 수락이니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이틀 동안 그의 집에서 묶기로 했다.
제프가 사는 인네버스는 ‘네스강의 하구’라는 뜻으로 하이랜드 교통의 중심지다. 전설의 괴물이 출현한 네스호로 유명하지만 그보다는 강을 끼고 있는 운치 있는 호숫가 마을과 높은 언덕 위의 올망졸망한 주거지 모습이 더 인상적인 동네였다.
간단히 동네를 둘러보는 것으로 관광을 마친 우리는 제프의 집으로 향했다. 처음으로 낯선 사람 집을 방문하는 나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초인종을 눌렀다. 커다란 체구의 허름한 옷차림을 한 금발의 중년 남자가 문을 연다. 피곤함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이 무표정하다. 미소도 없이 덤덤히 반긴다. 갑자기 민망해진다. 그에 대한 정보는 익히 들은 바지만 막상 겪고 보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우리를 거실로 안내하고 자신은 저녁을 준비하겠다고 곧바로 부엌으로 들어간다. 우리가 도와주겠다니 손사래를 치며 말린다. 별거 아니라며 간편하게 파스타를 삶고 소스를 만든다. 익숙한 솜씨다. 게다가 요리를 하며 손님인 우리를 마치 이웃집 사람인 양 편안하게 대한다. 격의 없는 태도에 긴장이 풀린다. 수다스러운 나는 그 분위기를 이용해 주섬주섬 대화를 나눈다. 어느새 서로 친
해진 느낌이다.
제프는 55세 싱글남이며 사회복지사다. 잉글랜드 남부지역에서 태어났지만 산이 좋아 스코틀랜드로 이주했단다. 그리고 은퇴 후 세계의 명산을 등반하는 게 꿈이란다. 얼마 전 등반사고로 다리를
심하게 다쳤지만 그의 산사랑은 여전했다.
식사를 마치고 제프는 외출 시 사용하라며 스스럼없이 자신의 현관문 열쇠를 우리에게 건넨다. 내일은 자신이 새벽 일찍 출장을 가니 아침에 볼 수 없기 때문이란다. 그는 자신의 부담 없는 초대
처럼 우리도 그의 집에서 자유롭게 지내길 바랐다.
그는 모자지간에도 성인 남녀는 따로 자야 한다며 마루에 아들의 침구를 펼쳐주고 나를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작은 방은 단출한 책상 하나에 소파베드 하나만 달랑 있었다. 소파베드를 펼치고 누워 자려는데 불현듯 방안의 공기가 낯설게 느껴져 다시 긴장된다. 낯선 공간의 성분을 감지하느라 감각의 촉수들이 제멋대로 펼쳐져 신경이 어지럽다. 준비해 온 슬리핑백에 깊숙이 몸을 구겨 넣
고 친숙한 냄새를 애써 킁킁대며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일찍 간단히 토스트를 챙겨 먹고 제프의 집을 나와 그가 추천한 주변 명소로 향했다. 산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그는 현지인만이 아는 신비의 주변 절경을 소개해주었다. 그곳은 그야말로 어떤 관광책자에도 나오지 않은 숨겨진 비경이었다. 인적도 드물고 덩그러니 산속 깊이 숨어 있지만 흥미로운 공간들이 보물처럼 숨겨져 있었다. 신비로운 색채의 산맥이 끊임없이 이어지다 어느새 불쑥 기암괴석과 석회석 언덕들이 출몰하더니 다시 거울같이 투명한 호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마치 현실이 아닌 가상세계 속에 있는 것처럼 아득했다.
저녁이 되자 우리는 제프와 동네 펍으로 향했다. 카우치 서핑은 게스트가 답례로 호스트에게 한 끼의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 통례다. 저녁식사 메뉴로는 스코틀랜드에 오면 꼭 먹어야 한다는 하기스를 주문했다. 하기스는 양이나 송아지 내장을 잘게 다져 양념한 후 오트밀을 섞어 만든 한국의 순대 같은 전통요리다. 몽클한 식감이 살짝 씹히는 듯하더니 혀 밑에서 부드럽게 녹았다. 맥주를 곁들이니 내장의 다소 텁텁한 뒷맛까지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식사를 하는 동안 영어가 능통한 아들보다 어눌한 내가 제프와 더 많이 친해졌다. 친교보다는 숙박이라는 젊은이들의 댓글이 떠오르며 뜻밖의 교제에 뿌듯해졌다. 언어적 소통보다는 세대적 공감이 더 정서적 교감을 풍부하게 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는 가진 건 없지만 자신이 줄 수 있는 걸 담백하게 베풀며 그 순간의 의미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서 남을 위해 무언가를 할 때 경제 방정식으로 나타나지 않는 ‘기쁨’이란 막대한 순이익들이 발생한다. 그 ‘기쁨’이 지금 소박한 그를 가장 부유하게 해주고 있음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