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아이들은 어떻게 무기력해질까?

<무기력의 비밀>

by 더굿북

어느 교사의 사연


제가 학교에 가는 것을 두렵게 만드는 다섯 명의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들은 과제를 내주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해오지 않고 모둠 활동을 시켜도 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고 하면 호응하지 않거나 싫다는 내색을 심하게 해서 다른 아이들까지 방해하는 게 아닐까 싶어 화가 날 때도 많습니다. 특히 저를 가장 속상하게 만드는 아이는 초등학교 때까지 영재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는 똑똑하고 인물도 훤칠한 아이입니다. 집안도 부유해서 학원을 여러 군데 다니고 성적도 좋은 편입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중학교에 진학한 뒤부터 갑자기 무기력한 아이로 돌변했다고 하니까 왠지 저를 만나서 변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기도 합니다. 저는 아무 잘못도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왜 그러는 걸까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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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거나 자고, 엎드려 있고, 입만 열면 힘들다 괴롭다 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아이들…. 우리가 매일 만나는 무기력한 아이들은 저마다 무기력해진 사연을 가지고 있다. 과연 어떤 사연들일까? 무기력한 아이를 돕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면 이제 아이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를 듣고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아이들도 무기력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명백하다. 일단 무기력하게 지내는 것은 생명체의 본성에 맞지 않는 일이라서 아이들의 속내를 잘 들여다보면 정말로 무기력하게 지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아이는 한 명도 없다. 재미있게 지내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까 그리고 재미있게 지내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았는데 실패하는 바람에 다시 하겠다고 호들갑을 떨거나 아등바등하는 것보다 당장은 그냥 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서 선택한 행동일 뿐이다.


무기력의 사연

무기력의 원인과 종류를 알려면 먼저 아이가 도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무기력해졌는지, 사연을 알고 분류해보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대부분 무기력은 만성적인 경향이 있지만, 간혹 최근에 무기력해졌다는 아이들이 있다. 그렇다는 것은 최근에 어떤 좌절을 겪었다는 뜻이며 아이를 좌절하게 만든 사건과 강도에 대한 이해가 어른 세대와 요즘 세대에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어른들이 그 이유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면 ‘왜 그 정도의 일로 무기력해졌는지’를 납득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우리 세대가 자라던 시절에는, 즉 우리 부모님들이 살아가던 시절에는 웬만한 일로는 좌절하지 않았을뿐더러 혹시 좌절하더라도 좌절을 하게 만든 사안의 규모가 꽤 컸다. 가령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든지, 하루아침에 집안이 쫄딱 망했다든지, 또는 역사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났다든지 하는 정도로 쉽게 말해서 빅 스트레스, 매크로 스트레스가 있었다. 그리고 인생의 커다란 사건 앞에서 좌절하고 얼마간 무기력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좌절감과 무기력이 오히려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원인이 된 사건에 공감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별 이유도 없이 갑자기 무기력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가만히 지켜보면 한 달 내내 그러는 경우도 흔해서 아이를 불러서 “너 요즘 왜 그러니?”, “왜 학교에 와서 잠만 자고 가니?”, “왜 아무것도 안 하려고 드니?”, “혹시 최근에 무슨 일 있었니?” 하는 식으로 물은 뒤에 아이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도 납득이 잘 안 가는 일이 허다하다. 어른 입장에서는 ‘아니, 고작 그 정도 가지고?’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가령 중학생 아이가 연애하다가 차여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이것은 아이를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는 인생의 중요한 사건에 포함될까, 안 될까? 혹은 중간고사에서 성적이 잘 나오면 엄마가 핸드폰을 바꿔주기로 했는데 성적이 올랐는데도 핸드폰을 바꿔주지 않아서 뭔가를 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면 핸드폰을 새로 사주지 않은 것은 아이에게 중요한 일일까, 그렇지 않을까?

이 두 가지 예에서 아이가 그럴 수 있다고 수긍하는 사람이라면 요즘 아이들의 무기력을 조금은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즘 아이들에게 생기는 빅 스트레스는 어른들이 보기에는 마이너스 스트레스 정도에 해당하는 사소한 것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령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가 텔레비전 음악 프로그램에서 5주 동안 1위를 차지하다가 순위권 바깥으로 밀렸다면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교 1, 2학년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는 이것 때문에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기 싫어질 수 있다. 좋아하는 가수의 순위를 올리기 위해서 하루 종일 관련 사이트에 들어가 클릭만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수 있다. 가난해서 먹고살기 힘든 개발도상국 시절이라는 빅스트레스를 거친 어른 세대는 개발 이후의 세대, 지금과 같은 풍요로운 사회를 태어날 때부터 배경으로 살고 있는 아이들이 느끼는 좌절과 불만을 이해하기에는 사회적 맥락 자체가 달라졌다고 보아야 한다.

“제가 엄청 좋아하는 선생님이 있는데 지난 수업 시간에 절 쳐다보지도 않는 거예요. 그런데 그때만이 아니고 그다음 시간에도 눈길을 안 주잖아요. 제가 찾아가서 말을 걸려고 했더니 바쁘다며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세 번이나 그랬다니까요. 선생님이 절 버렸어요. 그 수업은 이제 듣고 싶지도 않다는 생각뿐인데, 그래도 안 달래줘요.”

이 일로 아이가 한 달을 내리 고민하다가 이제 수업 시간에 아예 엎드려서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면 어떤가?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사실 순순히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이기에는 왠지 모를 저항감이 생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애완견이 죽었다고 학교에 못 가겠다는 아이를 상담한 적도 있다. 아이 엄마가 왜 학교에 안 가냐고 묻자 ‘예전에 할머니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3일 동안 학교에 안 갔는데 우리가 10년이나 키운 개가 죽었는데 어떻게 가냐, 슬퍼서 못 간다’고 하더란다. 그리고 당분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냥 내버려 두라고 했다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아이들이 느끼는 좌절감의 패러다임은 예전과 크게 달라졌다. 부모나 교사 세대가 자라던 시절에는 정말 사소하고 비주류였던 일들이 요즘 아이들에게는 큰 스트레스로 다가와서 감당하기 힘든 경험이 되곤 한다. 이렇게 어른들이 보기에는 별것 아닌 일, 자기 주변에서 벌어지는 아주 사소한 일들로 아이들은 무기력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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