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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Oct 31. 2016

01. 약점을 보여도 괜찮지 않을까?

<112일간의 엄마>

나오를 처음 만나게 되었던 건 「간사이 정보넷 ten.」 덕분이었다.


나는 2009년 3월 30일에 시작된 저녁 보도 프로그램인 「ten.」으로 요미우리 TV에 입사한 이래 처음으로 보도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정보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위주로 일해왔던 나에게 보도 프로그램 진행이란 새로운 영역을 경험할 큰 기회였다. 다만 불안감도 그에 못지않게 컸다.

그런 나의 불안을 누그러뜨려주는 존재가 바로 나오— 훗날 나의 반려자가 되는 여성— 였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미덥지 않은 캐스터였다. 다른 방송국이 보통 40~50대 베테랑 뉴스 캐스터를 중심에 앉히는 데 반해 나는 30대 중반. 저녁 이 시간대의 주요 시청자는 이른바 F3층(50세 이상 여성)과 M3층(50세 이상 남성)이다.

“애송이가 뭘 안다고.”
“버라이어티 출신이 뉴스를 제대로 읽기는 할까?”
“시미켄한테 맡겨도 정말 괜찮을까?”
은연중에 그런 말들이 돌던 것도 알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 8시까지 출근해 주요 일간지를 비롯하여 경제지, 스포츠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문을 훑는다.
그러고 나서 본방 종료 때까지 머리를 풀가동. 몇 차례 협의를 거치면서 코멘트를 정리하고 다양한 주제를 선정하여 본방에 임한다.
오후 2시경, 헤어 손질과 메이크업을 받고 의상을 갈아입는다. 차분하게 숨 고르기를 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그리고 오후 4시 47분부터 본방. 생방송이 끝나는 오후 7시까지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집에 돌아오면 이때부터는 ‘자기 반성회’ 시간이다. 녹화해둔 그날 분의 방송을 찬찬히 다시 본다.
한 마디 한 마디를 꼼꼼하게 모니터하고, 다음 날 방송에 대비한다. 날마다 이 과정을 되풀이했다.

2011년 9월부터 메인 캐스터가 되었다. 「ten.」은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어느 시간대든 다채로운 패널리스트와 함께 시청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프로그램, 시청자와 함께 생각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 캐스터로서 내가 늘 바라는 점이었다.

간사이 정보넷 ten을 진행하는 시미켄


타협하려 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내 등에는 백 명이 넘는 스태프들의 생각이 실려 있다. 나는 단지 그 사람들을 대표하여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미켄이라서 안 볼래” 하고 시청자들에게 외면당한다면 그 많은 스태프들의 생각과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버린다. 올곧게 그리고 열심히, 나는 계속 달렸다. 그러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듬해에는 2부로 시청률 1위를 획득, 이후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1부도 뉴스 프로그램 중에서는 1위에 올라설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기쁜 일이긴 하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내게 큰 부담이기도 했다.

보도 프로그램으로 옮겨온 내게 헤어 손질과 메이크업을 받고 의상을 갈아입는 시간은 무척 귀중했다. 본방 서너 시간 전부터는 늘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고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오늘은 지치네’ 하는 생각이 드는 날이 있는가 하면, 솔직히 말해 기분이 내키지 않는 날도 있었다. 또 나만의 세계에 들어앉아 주변 소리를 전부 차단하고 싶은 날도 있었다. 여하튼 일이 너무 벅차다 보니 전장으로 나가기 전, 나 자신을 새롭게 바꾸는 시간이 귀중할 수밖에 없었다.

나오는 보조 스타일리스트 중 한 명이었다. 이때 나오는 스물넷. 오사카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스타일리스트 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메인 스타일리스트의 어시스턴트로 일하고 있던 참이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평일에는 날마다 얼굴을 마주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과 중에 한두 마디씩 대화를 나눌 정도가 되었지만, 처음부터 그녀의 존재가 신경 쓰였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스태프 중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 워낙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맞는 대답인지도 모르겠다. 반년쯤 지났을까. 그사이 나오는 어시스턴트가 아닌 정식 스타일리스트로서 나를 전담하게 되었다.

“오늘은 좀 피곤하신가 봐요?”

언제부터였을까, 그 한마디가 신경 쓰이게 된 것이. ‘신경 쓰였다’라는 표현은 옳지 않을지 모른다. 나오의 그 말은 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기분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런가 하면, 내가 누구와도 아는 체하고 싶지 않아 나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있는 듯한 날엔 나오는 절대 말을 붙이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시미켄’으론 안 된다는 것은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캐스터에게는 신뢰감이 필요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누구보다 많이 공부하고 누구보다 먼저 현장에 나가 취재한다. 이러한 것들이 필요하다. 시청자들의 신뢰를 얻어야 하는 것은 물론, “시미즈, 이제 좀 제대로 하는 것 같네”라고 봐주는 스태프나 보도부 기자들의 신뢰도 필요하다. 그것을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한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캐스터라고 해서 딱히 대단할 건 없다. 지극히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해내느냐 마느냐, 그 점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은 피곤하니 이 신문은 읽지 말고 넘어갈까?’, ‘오늘 밤은 너무 졸린데 자기 반성회를 생략할까?’라는 생각이 들어도, 나는 한다. 왜? 불안하기 때문에 한다.

특히 메인 캐스터 자리에 앉은 초창기에는(지금도 그렇지만) 하루하루 너무 불안해서 잠 못 드는 날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 불안이 평소의 다섯 배, 열 배로 밀려드는 날도 있었다. 예를 들어, 하시모토 도오루 오사카 시장(당시)이 오늘 스튜디오에 출연하기로 되어 있다면 나의 불안은 배가되었다. 또 대여섯 시간씩 이어지는 특별 프로그램이 잡혀 있어도 역시 불안했다.

내가 과연 시장과 마주 앉아 제대로 된 토론을 이끌어갈 수 있을까, 다섯 시간이고 여섯 시간이고 온전히 유익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까, 하고. 당연히 기자나 스태프들에게 이런 심정을 털어놓을 순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면 어디에다 약한 소리를 해야 하나……. 그런 나날의 연속이었다.

어느덧 나는 그녀가 옷을 갈아입혀주는 동안 툭 하니 말을 건네게 되었다.

“오늘 괜찮을까.”
나오는 생긋 웃어주었다.
“문제없어요.”
숨겨도 그만이었다. 그때까지 몇 명의 여자를 사귀어봤지만, 나도 모르게 허세가 몸에 배어버렸는지 약점을 내보이기가 어려웠다. 가끔은 기대고도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오는 달랐다.

‘약점을 보여도 괜찮은 건가?’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약점을 보여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옷을 갈아입는 시간이 내게는 자연스레 치유의 시간으로 변해갔다. 나오가 입혀주는 재킷에 팔을 꿰고 나오가 매주는 넥타이를 한다. 나오라는 존재가 나의 일상 속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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