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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08. 2016

03. 페이퍼 컴퍼니의 왕국, 그리스

<글로벌 금융 탐방기>

그리스는 보유 선박량만 해도 5천 척이 넘는 세계 1위의 해운업 국가로서 전 세계 해양 수송량의 16%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리스가 세계 GDP에서는 단 0.4%만을 차지하고 있는 데 비해 해운에서는 40배나 높은 16%를 차지하고 있으니 엄청난 것이죠. (2위는 일본으로 세계 수송량의 13.5%를, 3위와 4위는 각각 중국 10.6%와 독일 7%, 한국은 5위로 4.7%다.)
     
최근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기가 침체하였기에 한국의 해운사들은 상당히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데요. 놀랍게도 그리스의 대형 선주들은 국제 해운 경기가 바닥을 찍었다고 판단하여 오히려 보유 선박량을 늘리는 추세라고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그리스의 선주들은 한국 조선사의 가장 큰 고객인데요. 중국 조선사와의 치열한 가격 경쟁 속에서도 그리스 선주들은 한국에 주문을 주고 있는 것이죠. (세계 1위였던 일본의 조선업이 밀린 이유가 일본은 표준 모델을 대량생산해서 싼값에 내놓았던 반면, 한국의 조선업체는 그리스 선주의 요구대로 각각의 배를 다르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 경제는 해운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해운회사가 페이퍼 컴퍼니(Paper company)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페이퍼 컴퍼니는 말 그대로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이름뿐인 회사로, 실제 업무를 하는 실질적인 회사는 따로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운회사는 왜 페이퍼 컴퍼니를 세울까?’ 하는 의구심이 드실 텐데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담보 때문인데요. 보통 배를 한 척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적게는 수천억, 비싸면 수조 원이나 듭니다. 당연히 해운회사에 이러한 막대한 돈이 없으므로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빌려서 조선사에 주문합니다. 빌려주는 은행 입장에서는 만일 해운회사가 갚지 못하거나 망하게 된다면 너무나도 큰 피해를 봅니다. 그래서 금융기관은 자금을 빌려주면서 해운사가 망하든 말든 관계없이 안전할 수 있도록 배를 담보로 잡고 싶은 것이지요.
     
배를 해운회사 소유로 하면 회사가 망했을 때 기존의 다른 채권자들이 이 배를 팔아 자신의 돈을 회수하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예 별도의 새로운 회사, 즉 페이퍼 컴퍼니를 세워 이 회사가 선박을 소유하게 하고 대출해준 금융기관이 배를 담보로 잡으면 기존의 다른 채권자가 없기에 안전하게 담보를 확보할 수 있지요.
     
둘째는 페이퍼 컴퍼니를 조세 회피 지역에 세우면 세금을 덜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파나마와 케이만 군도에 회사를 설립하면 소득세와 법인세를 전혀 안 내도 되고, 홍콩에서는 외국에서 얻은 소득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지 않습니다. 조세 회피 지역의 국가는 대체로 작은 나라가 많은데요. 이렇게 파격적인 세금정책을 시행하는 이유는 이렇게 해서라도 자금을 끌어와서 파생되는 부가 이익을 얻기 위함이지요. 그래서 주인은 그리스인이지만 이들이 조세 회피 지역에 세운 페이퍼 컴퍼니가 벌어들인 상당한 수익에 대해 그리스 정부가 과세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반면 수출 주도국인 한국은 상당 부분의 수익을 해외에서 벌어오지만, 회사가 한국에 설립되었으니 한국 정부가 과세할 수 있고요.
     
조세 회피 지역에 세운 페이퍼 컴퍼니에서는 이후 그리스에 지점을 내는데요. 이 그리스 지점에서 고용한 그리스 직원에게 주는 국내에서의 임금은 근로소득세를 가장 적게 낼 수 있는 액수만큼만 지급합니다. 예를 들어 직원의 연봉이 3,000만 원이라면 연봉 1,200만 원 이하가 최저 소득세 구간이니 1,199만 원만 지급하고, 나머지 금액은 해외 통장을 통해 직원에게 채워주는 방식이지요. 이렇게 되면 직원들은 세금을 적게 내서 좋고, 회사는 임금을 적게 주어도 되니 양쪽이 다 만족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막상 정부는 해운회사로부터 법인세를 못 거두고 개인에게는 소득세를 거둘 수 없기에 애꿎은 정부만 세금 손실을 봅니다. 정부로서는 이러한 관행을 막기 위해 해운업계에 압력을 가하고 싶지만, 만일 해운업자들이 이에 반발하여 아예 해외로 지점을 옮겨 버리면 골치 아픈 상황을 맞이하니 섣불리 행동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그리스에 지사를 내서 이렇게라도 고용을 창출해주고, 이로 인해 소비가 촉진되니 이쯤에서 양쪽이 타협을 본 셈이죠. 
     
한국의 경우 국세청의 시스템이 아주 잘 되어 있어 회사원뿐만 아니라 개인사업자의 세금도 잘 걷고 있으니 세금에 관한 한 한국과 그리스의 상황은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일단 국가가 잘살고 봐야 하는지, 아니면 자신과 가족과 같은 작은 울타리가 잘 사는 것이 더 중요한지 딱 부러지게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리스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그 어느 접점을 현명하게 찾아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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