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교황 알렉산더 6세는 1503년 8월에 사망했다. 주변에서는 그가 부주의로 독약을 마셨다는 소문이 돌았다. 교황이 죽자 아들 보르지아는 망명할 수밖에 없어, 처음에는 나폴리로 갔다가 스페인으로 이동했다. 당시 피렌체와 피사 사이에는 전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10월 피렌체 화가 길드에 다시 등록한 후 시뇨리아의 주문을 받아 전투 장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베키오 궁전에 있는 대회의실 벽에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벽화를 의뢰받은 것이다. 대회의실은 매우 컸는데 길이가 53m에 폭이 22m나 되었다. 10월 24일 그에게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아파트가 주어졌는데, 그와 제자들을 위한 배려였으며 교황들의 방으로 알려진 곳을 작업장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이때 <안기아리 전투>를 그렸고 미켈란젤로는 그 맞은편 벽에 <카시나 전투>를 그렸다. 시의회가 두 사람에게 작품을 의뢰한 것은 그리스도의 보호를 표방하고 피렌체가 과거에 거둔 군사적 승리를 표현함으로써 국가에 대한 희생을 미덕으로 삼으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 의도는 두 대가로 하여금 미학적 경쟁심을 유발시켰다.
<안기아리 전투>를 주제로 삼은 것이 레오나르도 자신인지, 마키아벨리의 주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작품은 세로 8m, 가로 20m로 레오나르도가 그린 가장 큰 그림이다. 대의원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1504년 5월 4일부터 이 그림에 대한 스케치를 시작했다. 그는 35플로린을 먼저 받았고 4월부터 매달 15플로린을 받으며 이듬해 2월까지 그리기로 약속했다. 바사리에 의하면 시뇨리아의 지불자가 월급을 잔돈으로 지불하자 레오나르도가 거절하며 “나는 잔돈이나 받는 화가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리는 데 3년 이상 소요했다.
미켈란젤로는 로지아 반대편 벽에 피렌체와 피사 사이에 벌어진 카시나 전투에서 피렌체가 승리한 날을 기념하는 작품을 의뢰받았다. 시의회가 카시나 전투 장면을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할 때만 해도 피렌체는 아직 피사에게 굴복하지 않은 때였다. 미켈란젤로는 벌거벗은 남자들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묘사했는데 과격한 전투 장면을 누드로 그린 것은 처음이다. 그가 선택한 에피소드는 역사가 필리포 빌라니와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역사』에 기술한 내용으로 두 사람의 기록에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대략 다음과 같다. 1364년 7월 29일 무더운 날 피렌체 군인들은 카시나 근처 아르노 강에서 미역을 감고 있었는데 피사 군인들에 의해 포위될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다 피렌체 지휘관이 실수로 한 경고에 놀라 허겁지겁 뭍으로 올라왔다는 에피소드이다. 이것을 소재로 한 드로잉을 보면 군인들은 재빨리 옷을 걸치고 무장하려는 태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당초 시의회에서 원하던 장면과는 거리가 있었다. 시의회는 영웅이 등장하고 피렌체가 승리하는 장면을 묘사하기를 원했지만 미켈란젤로의 드로잉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익살스러운 에피소드였을 뿐이다.
미켈란젤로의 <카시나 전투>는 반대편 벽에 <안기아리 전투>를 그리고 있던 연장자이자 예술의 위대한 적 레오나르도와 그를 대결하게 했다. 세로 7m, 가로 17.5m로 추정되는 이 커다란 그림을 그리면서 미켈란젤로는 일그러진 남자 누드를 그리는 데 관심을 집중하였고, 나중에 시스티나 예배당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리게 되었다.
루벤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안기아리 전투 유채 스케치> _안기아리 전투는 1440년 보르고 산 세폴크로 근처 안기아리에서 피렌체와 밀라노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밀라노군을 참패시킨 유명한 사건이다. 피렌체 군대는 40개의 기병 대대와 2천 명의 보병, 그리고 포병이 동원되었다. 마키아벨리의 기록에 의하면 승리한 피렌체군은 실수로 낙마한 단 한 명의 사상자만 냈을 뿐이다.
미켈란젤로가 남자 누드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 해부학에 전념한 데 기인하기도 하지만 정신에 내재하는 형상을 구체화하는 작업이 신이 자신의 피조물을 관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조각상이 신적 광기의 황홀경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믿었으며, 이는 영혼이 개별적인 사물 속에서 지상으로의 하강 이전에 누린, 피치노의 말로 하면 “형언할 수 없는 신적 광휘”를 일시적으로 목격한 흥분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는 플라톤적 사랑의 광기에 의해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영혼의 상승을 조각상에서 나타내려고 했으며, 형상이 질료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해서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기록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염색공들의 병원 오스페달레 데이 틴토리에서 그렸다고 하지만 그 드로잉은 17세기 중반에 모두 사라져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1542년 바스티아노(아리스토텔) 다 상갈로의 모사작이 있어 부분적으로나마 어떤 작품인가 짐작할 수 있다. 상갈로가 모사한 장면은 중앙 부분으로 좀 더 많은 사람과 말들이 등장하는 작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배경이 생략되어 전체 장면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바사리는 이와 같이 적었다.
똑바로 선 자세, 무릎 꿇은 자세, 몸을 겹친 자세, 엉거주춤한 자세, 원근을 맞추기가 까다로운 자세 등 다양하다. 게다가 뭉쳐진 인물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려졌다. 마치 회화에 대한 지식을 뽐내기라도 하듯 목탄으로 윤곽선을 그리거나 선을 이용해 음영을 표시하거나 흰색으로 부드럽게 명암을 표현하는 방식을 두루 사용했다.
레오나르도가 처음 미켈란젤로를 만난 건 1504년 2월이었던 것 같다. 당시 레오나르도는 52살, 미켈란젤로는 29살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의 <안기아리 전투>의 일부를 모사했고 레오나르도는 미켈란젤로의 <다윗>을 모사함으로써 서로의 재능에 존경을 표했다. 하지만 일화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자기보다 명성이 높고 사교성도 좋은 레오나르도를 상당히 싫어했다고 한다.
하루는 레오나르도가 화가 조반니 디 가비나와 함께 스피니 궁전 앞 산타 트리니타 광장을 걷고 있었는데 벤치에서 잡담을 하던 사람들이 레오나르도를 불러 세웠다. 그들은 단테의 글에서 난해한 부분을 지적하며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때 마침 미켈란젤로의 모습이 광장에 나타나자 레오나르도가 말했다. “저기 미켈란젤로가 오고 있군. 그가 말해줄 걸세.” 그러자 미켈란젤로가 벌컥 화를 내며 “선생 스스로 대답하시오. 선생은 말을 모델로 만들었지만 청동으로는 뜨지 않고 결국 포기한 것을 부끄러운 줄 아시오”라고 말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레오나르도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었는데 미켈란젤로가 뒤를 돌아보며 다시 말했다. “어리석은 밀라노인들이나 선생을 믿었던 거요.”
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미켈란젤로가 레오나르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미켈란젤로의 화풍이 레오나르도와 상당히 닮았다는 점이다. 이후 레오나르도는 <안기아리 전투>를 완성시키지 않고 1506년 5월에 밀라노로 돌아갔다. 미켈란젤로도 <카시나 전투>를 미완성으로 남긴 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