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일간의 엄마>
나는 나오 모르게 재택 의료를 알아보고, 시간 나는 대로 종말기 케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러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
힘들지 않게, 두렵지 않게, 고통스럽지 않게.
나는 나오를 위해 어떻게든 그렇게 해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완화 치료로 전환 — 그 ‘스위치’를 누구도 아닌 내가 누른 것이다. 그 스위치를 눌렀다는 건 나오가 마지막을 맞이한다는 의미였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동안 내 안에선 무언가가 갈가리 찢겨나가는 것만 같았다. 나오가 오래도록 살아 있어주길 바라면서도 나는 이렇게 나오의 마지막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나오를 위해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건 나오의 생을 끝내기 위한 준비다.
한 가지 선택지는 호스피스(완화 치료 병동)였다. 오사카에도 시설이 잘 갖춰진 호스피스는 있다. 다만 내 머릿속에 호스피스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나오, 호스피스로 갈래?” 차마 그 말은 할 수 없었다. 본인이 어디까지 알고 있든, 아들을 낳고 엄마가 된 지 채 석 달도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 끝에 다다른 곳이 고베 시 포트아일랜드에 있는 소아암 전문 치료 시설 ‘차일드 케모 하우스’였다.
통칭 ‘차이케모’는 소아암 치료 중인 아이들과 그 가족의 QOL(Quality Of Life, 생활의 질)을 배려한 일본 최초의 전문 치료 시설이다. 이곳에선 환자와 가족들이 함께 생활하는 것은 물론 전문적인 치료까지 받을 수 있다. QOL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시설은 병원이라기보다 휴식을 위한 장소 같았다. 마치 집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치료를 하면서 아이와 함께 생활할 수 있다. 나는 그것만 생각했다.
차이케모의 구스키 의사 선생님에게 머리 숙여 사정을 이야기했다. 선생님도 이해해주신 데다 그때를 대비해 용태 확인도 할 겸 몇 차례 집에 왕진까지 와주셨다. 나는 나오에게도 한 차례 차이케모의 팸플릿을 보여주었다.
“여기, 침대도 편해 보이고, 어쩐지 좋아 보여. 한번 가볼까?”
“응.”
그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방송 일을 쉬기로 한 때에 맞춰 차이케모로 옮기는 방법도 있었지만, 나오와 나는 아직 병마와 싸우는 것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의사 선생님은 ‘항암제는 더 이상 어려울 것 같다’고 했지만, 이따금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나오를 보면 아직 맞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나도 버리지 못했다. 장모님까지 와 계신 우리 집에서 아들과 나오와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빈둥거리며 보냈다. 나오의 얼굴에선 미소가 끊이지 않았고 의사소통도 확실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2월 5일. 한 가닥 희망에 의지하여 JCHO 오사카 병원으로 혈액검사를 받으러 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두 시간을 기다렸다. 내게는 그 시간이 평소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괜찮아.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런데 담당의는 내가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얼굴을 숙였다.
“항암제는 더 이상 맞을 수 없습니다.”
그날 밤, 나는 아들을 우리 부모님에게 맡겼다. 오랜만에 나오와 단둘이 집에 있게 되었다.
“많이 안 좋아졌어. ……눈치챘겠지만.”
“응.”
“그래서 이제, 항암제는 맞을 수 없어.”
“응.”
“나오, 미안해.”
“응.”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오 앞에서 울지 않겠노라 다짐했건만 눈물이 솟구쳤다.
“미안해…… 나오……. 조금만 울어도 될까?”
“응.”
“나오, 나오도 울어도 돼.”
“응. 하지만 울지 않을 거야. 울면 무너져버릴 테니.”
“…….”
“난 아직 좋은 아내이고 싶고, 좋은 엄마이고 싶은걸.”
흐느껴 울었다. 오열을 멈출 수 없었다. 울면 안 되는 줄 알면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 나오 앞에서 나 혼자 울었다.
나오에게 말했다.
“약속해줘. 이제 힘들면 나한테 힘들다고 말해줘. 나도 말할게. 힘들면 나도 말할 테니, 나오도. 약속해.”
“응.”
“이제 참는 건 하지 마.”
“응.”
첫 약한 소리
이튿날인 6일 아침에 나오는 처음으로 약한 소리를 했다.
“힘들어…….”
“왜 그래?”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복수와 흉수가 차올라 호흡이 곤란해질지도 모른다는 건 의사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게 틀림없었다. 한 마디 한 마디 말할 때마다 쌕쌕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알았어. 그럼 차이케모로 가자.”
“힘들어서…… 가까운…… 병원으로…… 가고 싶어.”
“알았어.”
택시를 잡아타고 오사카 병원으로 달려갔다. 택시 안에서 담당의에게 전화로 연락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처치가 시작되었다. 긴급 입원이었다.
“산소 수치는?”, “나오 씨, 지금 어디가 제일 불편하세요?” 의료진은 분주하면서도 침착하게 용태를 확인해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오사카 병원의 담당의, 간호사분들은 정말 애를 많이 써 주셨다. 하지만 이미 나오는 항암제를 맞을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나오의 고통을 덜어주려면 진통제를 놓는 수밖에 없었다.
의료용 마약과 스테로이드다. 이제 통증에 듣는 약은 이것밖에 없었다. 다만 문제는 간 기능이 극도로 떨어진 나오에게 의료용 마약과 스테로이드를 주입하면 부작용이 예상보다 더 심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거였다. 혈중 암모니아 수치도 높아서 간성뇌증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간에서 제거되어야 할 독성 물질이 혈액 속에 머물러 있다가 결국 뇌로 가서 뇌 기능을 떨어뜨리고 그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환각 또는 정신착란 증세를 보일 수도 있다는 것. 의료용 마약과 스테로이드를 주입하게 되면 이 의식장애가 빠르게 진행될 위험이 있었다.
힘들지 않게, 두렵지 않게, 고통스럽지 않게.
사랑하는 아내에게, 사랑하는 아들의 엄마에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시미즈 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의사 선생님이 결단을 재촉했다.
결단. 그 ‘스위치’는 또 내가 눌러야 했다. 나는 병세를 알고 있는 데다 그 주사를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도 알고 있었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거나 혼수상태에 빠질지도 모른다. 만약 스위치를 누르지 않으면 앞으로 하루를 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오는 “아직은 힘낼 수 있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지금 나오의 인생을 빼앗으려 하는 건가. 어쩌면, 앞으로 한 시간만이라도 더 말을 하고 싶어 할지 모르는데.
그래도 내가 스위치를 눌러야 했다. 당연히 남편인 내가 결정해야 했다. 결단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오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고 싶지 않다. 괴로워하는 나오를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고통을 멈추면, 자칫 의식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나오, 나오는 어떻게 하길 원해?
‘응.’
나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결국, 나는 또다시 ‘스위치’를 눌렀다.
나오는 산소 호흡기를 달고 신경안정제와 스테로이드, 의료용 마약을 점적 투여받았다. 간성뇌증을 예방하는 점적도 시작되었다. 한때 위독한 상태였던 나오는 한 시간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만나두어야 할 사람들에게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힘들어 보이는 와중에도, 병실에 찾아온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나오는 웃는 낯이었다. 장인, 장모님도 급히 달려오셔서, 온화하게 담소를 나누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런 나오를 보며 나는 후회하고 있었다. 어쩌자고 저런 사람 앞에서 울어버렸는지. 어쩌자고. 끝까지 ‘희망’의 끈을 함께 쥐고 놓지 않겠노라 다짐했건만, 어쩌자고. 어쩌자고 나오를 벼랑 끝까지 내몰아버리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는지. 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울지 않았다면, 나오는, 나오는…….
긴급 입원한 이튿날, 2월 7일. 나는 나오와 단둘이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그만 잘까?”
밤이 깊어 나오의 몸을 걱정해 꺼낸 말이었다.
“괜찮아?”
“응, 모두에게 ‘오늘 와줘서 고맙다’고 전해줘요.”
“알았어. 아버님, 어머님, 오빠들한테는?”
“다시 일어날 거라고.”
“알았어.”
“사랑하는 우리 아이한테는?”
“‘오늘도 착한 아이였구나, 또 함께 놀자’라고.”
“알았어. 꼭 안아줘.”
“응.”
“얼마나 착하다고. 나오가 꼭 얘기해줘.”
“응.”
“켄 씨, 내일, 또, 깨워줘요.”
“……알았어. 잘 자.”
나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것이 의사소통이 이루어진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그 밤 이후에는 간성뇌증이 진행되는 바람에 더 이상 누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