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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14. 2016

01. 실험으로 그친 실용주의 인사_홍석현 주미대사

<노무현이 선택한 사람들>

2004년 12월 16일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은 출입기자단과의 만찬에서 “신임 주미대사로 미국 사회와 지식인들의 대 한국 이미지를 고양시킬 수 있는 깜짝 놀랄 만한 ‘빅 카드’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늦은 시간임에도 앞 다투어 외교부를 취재한 언론사들은 ‘정부 고위관계자 발’로 그가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라고 일제히 보도했다.

홍석현의 주미대사 임명은 15대 대선 당시 ‘친 이회창’ 행보와 보수 성향으로 인해 여권 내부에서도 반발이 적지 않았다. 정청래 의원 등 재야 및 소장파 사이에서는 “관료와 언론은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며 즉각 불편한 반응이 나왔다. 참여연대와 전국언론노조 등은 그의 탈세 및 전과 등을 문제 삼아 부적절하다는 지적을 연일 쏟아냈다. 오히려 야당인 한나라당 임태희 대변인이 “실용주의적 인사로 국민이 기대해왔던 바이며 환영하고 평가한다.”라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때문에 홍 대사의 참여정부 요직 ‘발탁’은 심하게 표현하자면 ‘적과의 동침’에 비유할 만한 시도였다.

이렇듯 우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홍석현 회장을 선택한 진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말 ‘실용주의’를 내세우며 두 가지 기조 변화를 선택했다. 첫째는 참여정부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온 보수층 인사를 적극적으로 등용한 것이고, 둘째는 주된 관심사를 ‘정치 지상주의’에서 ‘경제 올인’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홍석현 카드는 첫 번째 변화의 상징적인 조치였다. 정치나 행정 경험이 거의 없고, 외교관 생활도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이 장관급 예우를 받는 세계 4강의 대사, 그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자리인 주미대사로 발탁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대미 외교에 공식적 부분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되면서 관계도 잘 굴러가고 있습니다. 미국에는 다양한 여론들이 있습니다. 미국 내 소위 지식인 사회라든지 연구소, 언론계에 퍼져 있는 한국에 대한 인식 또는 북핵 문제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구시대적이고 낡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미국이 접할 수 있는 정보가 과거의 것이 많고, 채널이 과거에 만들어진 것이 많기 때문이죠. 과거에 구축된 채널은 분단시대의 유산을 많이 안고 있고, 대미 저자세가 깔려 있습니다. 미국 내 여론의 인식을 바꿔나가는 것이 중요한 작업인데 옛날 그대로의 채널은 적절하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흔히 진보적 시각이라고 불리는 쪽도 새롭게 대화채널을 만든다는 것이 쉽지 않을뿐더러 대화가 잘 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런 점들을 고심하면서 시도해본 것입니다.”

열흘 후 노무현 대통령이 <경향신문>과의 송년특별회견에서 밝힌 홍석현 주미대사 기용 배경이다.

노 대통령이 언급한 것처럼 홍석현 회장을 발탁한 까닭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다. 이규형 당시 외교부 대변인의 공식 브리핑대로 홍 회장은 민간인 신분임에도 미국 조야와 상당한 친분이 있었다.

“홍 회장은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 미국 내 주요 언론기관과 학계의 주요 핵심인사들과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어 언론주도층을 대상으로 한국에 대한 이해를 제고하는 데 탁월한 인물이며,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 내정자를 비롯한 미 행정부와 의회에 인맥을 쌓아왔다.”

홍 회장은 미국 유학 중 라이스 장관 지명자 등과 두터운 교분을 쌓았으며, 2002년 국내 언론사 CEO로는 처음으로 세계신문협회(WAN) 회장에 선출된 이후 미국 지식인들이나 미국 언론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문제는 지지층의 반발을 살 정도로 원칙을 어겨가면서까지 깜짝 단행한 인사가 과연 옳았느냐 하는 점이다.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산업공학석사와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홍석현은 부친의 가업을 잇기 전까지 세계은행(IBRD) 이코노미스트 및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등 공공부문에서 일했지만 공직 경력은 ‘비서 업무’가 전부였다. 1983년 4월 강경식 재무부장관의 비서관으로 채용돼 그해 10월 청와대로 자리를 옮겨간 강경식 대통령 비서실장의 보좌관(행정관)으로 1985년 1월까지 근무했다. 이후 1986년 삼성코닝 상무로 입사해 경영수업을 받았고, 1994년부터 <중앙일보> 대표이사 겸 발행인을 맡아 언론인으로 변신했으며 2003년에 회장으로 취임했다.

순탄한 인생 항해를 거듭하던 홍석현의 첫 번째 시련은 1999년 9월에 찾아왔다. 국민의정부 국세청은 보광그룹에 대한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실시, 685억 원의 탈세 사실을 적발해 262억 원을 추징하고 대주주인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홍 사장은 한 달 후 구속되어 이듬해 5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 벌금 30억 원이 확정됐다. 혐의는 증여세와 양도세 25억 원 탈세 및 공사비 과다 책정으로 리베이트 6억 원을 챙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회복을 위한 경제계 인사들의 조기 복귀를 명분으로 3개월 후 8·15 특사로 사면복권이 됐다.

사실 이 정도 전과면 명백한 공직 부적격 사유에 해당한다. 게다가 위장전입과 부동산투기도 적지 않은 아킬레스건이었다. 홍 대사는 부임 직후 이헌재 경제부총리와 최영도 국가인권위원장이 위장전입과 부동산투기 의혹으로 자진사퇴한 다음 한 차례 위기를 겪었다. 경실련 등 시민단체들이 과거 홍 대사의 위장전입과 부동산투기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1979년 부친이 경기도 이천의 임야 4만 2,000여 평을 위장전입으로 매입하고 10년 뒤 13세이던 홍 대사에게 증여한 것이 첫 번째다. 둘째는 1984년에 홍 대사의 모친이 역시 위장전입으로 이천의 농지 3,000여 평을 추가로 매입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2001년 고 정주영 회장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별장 매입을 위해 모친을 위장 전입시켰다는 의혹이었다.

그러나 홍석현 대사는 공직자 재산공개 과정에서 “위장전입은 인정한다. 국민께 죄송하다.”라고 하면서도 “부동산 투기로 번 돈은 재산의 1%도 되지 않는다.”라며 시민단체의 공직 사퇴 요구를 묵살했다. 이 당시 그가 신고한 재산은 약 730억 원으로 행정부 공무원 중 최고액을 기록했다. 이렇듯 홍 대사는 위장전입과 부동산 투기 문제가 제법 시끄러웠고, 다른 주요 공직자들이 비슷한 사유로 낙마하는 가운데에서도 머나먼 미국 현지 근무 중이라는 이유로(?) 운 좋게도 대충 무마되는 듯했다. 그런데 여기까지였다. 삼성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이 불리하게 작용하면서, 결국은 ‘삼성 X-파일 사건’으로 물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홍석현의 부친은 <중앙일보> 회장을 지낸 고 홍진기이다. 그는 4·19혁명 당시 내무장관으로 시위대에 발포 명령을 내린 인물로, 혁명 직후 공직을 물러나 민주당 정부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며 5·16 쿠데타 후에 가석방됐다. 이때 손을 써서 그를 빼내준 사람이 바로 삼성그룹의 고 이병철 회장이다. 홍진기 전 회장은 1965년 창간된 <중앙일보>(사장 이병철) 부사장을 맡은 이후 1986년 작고할 때까지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을 경영했다.

홍진기 전 회장의 맏딸은 삼성미술관 리움의 홍라희 관장으로, 이건희 회장의 부인이자 홍석현의 누나다. 3남 홍석준은 삼성SDI 부사장을 거쳐 현재는 보광창업투자 회장을 맡고 있으며 차녀 홍라영은 삼성미술관 리움 총괄부관장을 맡고 있다. <중앙일보>는 1999년 삼성그룹과의 계열분리를 발표했지만, 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5년 7월 22일 <MBC>는 안기부 도청 테이프(X-파일) 녹취록 내용을 보도했다. 삼성 X-파일 사건은 옛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이학수 삼성그룹 비서실 사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의 대화 내용을 불법 도청한 것인데, 두 사람이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나눴던 대화 내용이 포함됐다. 특히 추석을 앞두고 전·현직 검찰 간부들에게 떡값 500만~2,000만 원씩을 주기로 했다는 구체적인 내용까지 보도되면서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져 나갔다. 참여연대가 삼성 등의 불법자금 제공 관련자 20여 명을 검찰에 고발했고, 홍 대사는 공직 사퇴 요구를 받게 됐다. 결국 사건 발생 나흘, 워싱턴 부임 5개월 만에 홍석현 대사는 사퇴 의사를 밝히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홍 대사의 임명은 또한 참여정부가 삼성과 사실상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가 사주로 있던 <중앙일보>는 참여정부와 노 대통령에게 대립의 날을 세웠던 보수언론의 대열에서 이탈해 중립 또는 ‘적대적이지 않은’ 쪽으로 돌아섰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른바 보수언론을 지칭하는 표현이 ‘조·중·동’에서 ‘조·동’으로 바뀌는 부수 효과도 얻었다. 그러나 홍 대사의 갑작스런 사퇴로 보수층과 손잡기를 통한 실용주의 인사는 겨우 실험만 하다가 끝이 나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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