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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21. 2016

07. 잉그리드 버그만을 울린 남자

<당신은 유일한 존재입니까>

잠시 당신이 만인의 시선을 받는 인기 여배우가 되었다고 상상해보자. 촬영을 끝내고 구름 같은 취재진에 둘러싸여 파리의 호텔 로비를 지나서 겨우 방으로 들어왔다. 샤워하고 침대에 누웠다. 바쁘게 보낸 하루 중에 나를 위한 시간은 거의 없었다. 

     
‘오늘도 이렇게 혼자 위스키나 한잔 마시고 자야 하나?’ 최고급 호텔의 시설은 훌륭하고 바깥바람을 안 쐰 것도 아닌데, 왠지 답답하다. 그때 벨이 울리고 작은 쪽지 하나가 문 밑으로 들어온다. 문을 열고 나갔는데 이미 사람은 없다. 호기심에 침대로 돌아와 쪽지를 열어본다. 쪽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 주제 : 저녁 식사, 프랑스 파리, 6일 오후 6시 45분
- 수신 : 당대 최고의 여배우에게 
   
1. 이것은 (두 사람) 공동의 노력이다.
2. 우리는 오늘 저녁 당신을 초대하는 이 초대장과 함께 꽃을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의논해본 결과, 꽃값 또는 저녁 식사 비용을 낼 수는 있으나 그 둘을 모두 낼 여력은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투표를 했고 근소한 차이로 저녁 식사가 선정됐다.
     
여배우는 기자들에게 떠밀리듯 호텔로 들어서다가 로비 소파에 앉아 호기심 어린 눈길로 자신을 보던 두 남자를 떠올렸다. 친구 사이 같았던 두 남자는 젊고 자유분방해 보였지만 진지하고 신선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여배우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계속 쪽지를 읽어간다.
     
3. 저녁 식사 생각이 없으면 꽃을 보낼 수도 있다는 제안이 있었다. 이 안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4. 꽃 말고도 우리에게는 어정쩡한 재료들이 많다.
5. 우리의 매력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더 자세히 쓰면 정작 해야 할 얘깃거리가 떨어질 것이다.
6. 우리는 6시 15분에 당신에게 전화할 것이다.
7. 우리는 잠을 자지 않는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인 당신이 낯선 두 남자의 초대를 받았다. 나갈 것인가, 방에 머물 것인가. 만약 당신이 이 여배우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실제로 이 편지를 받았던 여배우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기적 같은 일에 두 남자는 깜짝 놀랐지만, 쪽지에 쓴 대로 세 사람은 유쾌한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쪽지를 받은 여배우는 세계적인 인기와 명성을 누리던 잉그리드 버그만, 편지를 보낸 두 남자는 종군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와 작가인 어윈 쇼였다. 잉그리드 버그만을 만날 당시 두 남자는 조금 이름이 나 있기는 했지만, 빈털터리나 다름없었고, 세 사람은 버그만의 두툼한 지갑 덕분에 밤새도록 파리의 거리를 히피처럼 돌아다니며 즐겁게 놀았다고 전해진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를 움직인 것이 단지 호기심뿐이었을까? 카파와 쇼는 가진 것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있는 체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이 없지만,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많을 거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했고, 덕분에 최고 여배우와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버그만은 수많은 명사와 남자를 만났지만 그렇게 끌려들어 가는 기분은 처음이었다고 훗날 고백했다. 
     
이후 카파는 버그만의 간청으로 할리우드로 가서 배우들의 프로필 사진 등을 찍으면서 사교계의 명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콧대 높은 버그만이 거의 매달리듯이 붙잡았지만 “할리우드는 내가 가본 곳 중에 최악”이라는 말을 남기고 카파는 훌쩍 떠나버렸다. 결국, 그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지뢰를 밟고 목숨을 잃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종군기자답게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버그만이 로버트 카파에게 청혼했었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더욱 놀라운 일은 카파의 대답이 “No.”였다는 것.
     
자신의 청혼을 거절하고 전쟁터로 떠나 결국 죽음을 맞이한 이 나쁜 남자에 대해 버그만은 이렇게 말했다. “카파는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는 있지만 절대 무관심할 수는 없는 남자였어요.”
   
무엇이 전 세계 남자들의 마음을 쥐고 흔들었던 여배우를 이토록 사로잡았을까? 그것은 바로 카파가 자신만의 영토에 계속 머물렀기 때문이다. 카파는 철저히 카파다움을 유지했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서 자신이 해야 할 행동을 하며, 언제나 ‘카파’로 살았다. 종군기자로서의 카파만이 가장 멋있고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버그만을 사랑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영토에 들어가는 것은 한사코 거부했다. 그것이 바로 당대 최고의 여배우가 평생 그를 그리워하게 했던 이유다.
     
나만의 공간이 있는가? 고객이 그리워하게 하기 위해서는 고객이 동경하고 인정하는 나만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 공간에서 자신다움을 유지하는 것이 언제까지나 당당하고 매력적일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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