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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 myself!

나에게로 이르는 길

by 책꽃 BookFlower

내 다이어리 첫 장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Be myself. Love myself.”

어느 순간부터 이 짧은 문장이 내 삶의 기준이 되었다. 누구를 닮으려 애쓰던 시절을 지나, 나는 조금씩 ‘나답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배워가는 중이다. 우리는 흔히 삶의 기준을 거대한 신념에서 찾으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아주 사소한 선택의 순간에 드러난다. 하루를 어떻게 여는지, 어떤 말에 마음이 흔들리고 설레는지, 누구 앞에서 침묵하거나 목소리를 내는지. 그 작은 장면들이 모여 나라는 사람을 만든다.


나는 나인가

한동안 나는 그 기준을 잃은 채, 세상의 시선에 휘둘리며 살았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타인의 기준을 내 삶의 잣대로 삼았다. ‘남들에게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 좋은 평가를 좇고, 상처 주지 않으려 꼭 필요한 말도 못 하고, 조직의 기대에 부응하려 내 마음이 다치는 줄도 모르고 채찍질했다. 하지만 그 기준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남의 눈에 괜찮아 보이기 위해 애쓰는 동안, 내 안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불안은 커졌다. ‘좋은 게 좋은 거다’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정작 누구에게 좋은지도 모른 채 선택을 반복했다. 그렇게 나는 ‘나’보다 ‘그들’의 삶을 대신 살고 있었다.


흔들리며 피는 꽃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는 나로 산다는 것의 어려움을 표현한 유명한 문장이 있다.

“내 안에서 솟아나는,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삶의 기준은 흔들릴 때 드러난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예기치 못한 상실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믿었던 관계가 무너지고, 일의 의미조차 보이지 않던 날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멈춰 섰다. 그리고 많은 새벽, 홀로 깨어 조용히 물었다. 이 혼란 속에서도 지켜야 할 내 삶의 중심은 무엇일까.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진심으로 선택한 일이라면, 결과가 어떻든 후회하지 않는다. 삶의 마지막 순간, 주마등처럼 스칠 장면 속에서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고 싶었다. 그때 알게 되었다. 삶의 기준은 완벽함이 아니라 진심으로 고민한 시간과 그 선택의 흔적에 있다는 것을.


소유보다 존재로 살기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읽으며 생각했다. 가진 것이 늘어도 삶이 깊어지지는 않는다. 나는 ‘가지려는 삶’보다 ‘존재하는 삶’을 택하기로 했다. 소유 중심의 사람은 무언가를 잃을까 두려워한다. 반면 존재 중심의 사람은 잃는다는 개념보다 ‘지금 있음’의 충만함을 안다. 그래서 존재로 사는 사람은 가난하지 않다. 물건보다 의미를, 결과보다 경험을, 성취보다 성장을 소중히 여긴다.


존재로 산다는 건 거창한 수행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살아 있음을 온전히 느끼는 감각이다. 커피 한 잔의 향이 천천히 스며드는 순간, 달리며 호흡이 리듬을 찾는 그 찰나, 나는 비로소 ‘지금 여기’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공허하다. 찰나생(刹那生), 찰나멸(刹那滅). 존재는 순간마다 태어나고, 순간마다 사라지며, 그때마다 새롭게 살아난다.


진심으로 존재하는 사람


나를 ‘지금 이 순간’으로 데려가는 건 세 가지 일상이다. 달리기, 조용한 독서와 필사, 그리고 글쓰기. 달릴 때는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책을 읽고 베껴 쓰며 타인의 사유로 내 생각을 비춘다. 글을 쓰고 있으면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게 된다. 삶의 기준은 결국 무엇을 소중히 여길 것인가의 문제다. 나는 속도보다 방향을, 결과보다 과정을, 남의 기준보다 나의 진심을 택한다.


그렇게 살다 보니 자연스레 이타심이 자라났다. 자리이타(自利利他),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나에게도 이롭고 남에게도 이로운 길이 내가 선택할 길이며, 존재 그 자체가 이미 이타적 행위라고 믿는다. 이런 깨달음 이후, 나는 ‘좋은 사람’이 되려 애쓰기보다 ‘진심으로 존재하는 사람’이 되려 한다. 모든 기준은 완성형이 아니다. 상황이 달라지고, 나이가 들고, 마음이 변하면 기준도 조금씩 자란다. 때로는 옛 기준을 버려야 새로운 길이 열린다. 괴테의 말처럼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다. 흔들림은 무너짐이 아니라 성장의 전조이고, 내 안의 기준이 명료해질수록 세상의 소음은 고요해진다.


존재의 온도


사람마다 체온이 다르듯, 삶에도 각자의 온도가 있다. 그 온도는 말보다 행동에서, 표정보다 태도에서 드러난다. 온기가 없는 관계는 오래가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는 생각한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결국 어떤 온도로 세상과 마주 하는가의 문제라고 말이다. 평범한 하루 속에서 타인을 대하는 법, 일을 대하는 법, 나를 대하는 법. 이 세 가지 태도가 나의 철학을 증명한다. ‘따뜻함’은 단지 다정함이 아니라, 상대의 성장을 믿어주는 신뢰의 태도다. 아이의 실수를 혼내기보다 기다려주고, 동료의 부족함을 꼬집기보다 함께 성장할 길을 찾을 때, 그 따뜻함은 오래 남는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세상과 맞서는 일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도 내 온도를 잃지 않는 일인 것 같다. 살다 보면 자주 마음이 식는다. 기대가 무너지고, 관계가 틀어지고, 일상이 무거울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의 온도를 회복하는 루틴을 지킨다. 달리기는 몸으로 하는 명상이고, 글쓰기는 혼란함 속에서 나만의 질서를 찾는 기술이며, 독서는 타인의 체온을 잠시 빌려 오는 일이다. 책 속 한 문장이 내 마음의 따뜻하게 하고, 다시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게 한다. 나의 철학은 거창한 구호보다 내 마음이 식지 않도록 지켜주는 작은 습관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직도 길을 찾는 나에게


나는 여전히 흔들리고, 때로는 불안하다. 하지만 예전처럼 나를 탓하지는 않는다. 기준을 세우고 온도를 지키려 애쓴 시간들이 내 안에 조용한 중심을 만들어주었다. 포기하지 않고 버텨준 나 자신에게 감사한다. 그 어둡고 견디기 힘든 시간들은 실패의 기록이 아니라 나에게로 이르는 여정의 증거였다.


“괜찮아, 완벽하지 않아도 돼.”

삶은 통제의 문제가 아니라 수용임을 배웠다. 나는 ‘지관(止觀)’, 멈추어 바라보는 마음의 자세를 좋아한다. 세상을 향하던 시선을 내 안으로 돌려,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불안과 게으름, 서툼과 욕심까지도 나라는 존재의 일부로 껴안는다. 중요한 건 넘어지지 않음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방식이다.


오늘의 나로 충분하다


나는 매사에 긍정의 마음으로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나의 기준과 온도를 잃지 않는 삶을 꿈꾼다. 다시 길을 잃더라도 괜찮다. 이미 나에게로 돌아오는 법을 배웠으니까. 지금 이 순간 내가 옳다고 믿는 일을, 내가 믿는 방식으로 해내며 오늘 하루를 살뿐이다. 그러고 보면, 이동진 평론가가 한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라는 말이 정말 딱 맞는 말 같다. 누군가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걸음으로 오늘을 살아내겠다는 다짐. 삶의 기준은 거창하지 않다. 아침에 일어날 때의 마음, 누군가를 대할 때의 온기, 매일의 선택에서 나를 잃지 않으려는 작은 용기. 그것이면 충분하다.


“Be myself. Trust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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