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한 삶을 음미하는 슬로우 라이프
세상이 너무 빨라 따라가기 벅차다. 손끝에서는 끝없이 정보가 새로고침되고, 스마트폰 알림은 쉼 없이 울린다. 나보다 내 취향을 더 잘 찾아주는 알고리즘이 알아서 영상을 물어다 주니, 그 무한 재생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 비하면 세상은 확실히 ‘2배속’이 되었다. SNS 속 사람들은 마치 하루 48시간을 사는 사람들처럼 살고, 나는 그 속도를 따라가려 애쓰다 자주 무기력해졌다.
“정말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이렇게까지 바쁘게 사는게 맞는걸까?”
삶이 빽빽할수록 마음은 더 비어갔다. 일정표는 가득 채웠지만, 그 안에 ‘나’라는 존재는 없었다. 늘 시간에 쫓기듯 살면서 하루의 만족감은 점점 떨어지고, 어렵게 지켜오던 마음의 온도도 낮아졌다. 내면의 소리를 들을 고요한 시간이 찾아오면 불안이 함께 찾아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조차도 잘못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모르고 있는 사이 ‘쉼’을 잃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생각의 방향을 바꿔보기로 했다. 빠름 대신 느림을, 더하기 대신 빼기를 택해보기로. 15분 단위로 빼곡히 짜던 시간표를 내려놓고 ‘오전·오후’ 정도의 큰 흐름만 적는 다이어리로 바꾸었다. 시간에 쫓기기보다는 해야 할 일,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방식이었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마다 우선순위를 먼저 생각하고, ‘바쁘다’는 말이 떠오를 때마다 내가 혹시 스스로 만들어낸 가짜 바쁨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다.
책상 모니터 옆에 ‘망중한(忙中閑)’이라는 단어를 붙여두었다. 아무리 바빠도 잠시 여유는 반드시 있다는 뜻. 그 작은 약속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덕에 아무리 일이 몰리는 날에도 점심 이후 가벼운 산책을 하고, 단 한 단락이라도 책을 읽었다. 김훈 작가가 하루에 원고지 다섯매를 쓰겠다는 의미로 ‘필일오(必日五)’를 적어두듯, ‘필일십오(必日十五)’라고 적어붙였다. 아무리 바빠도 15분(하루의 1퍼센트)은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삶을 천천히 음미하기 위한 15분 루틴을 만들었다. 눈 뜨자마자 침대에서 스트레칭 15분, 점심 식사 후 독서 15분, 잠자기 전 글쓰기 15분. 딱 그정도면 충분했다.
그렇게 느림의 감각을 조금씩 회복해가던 어느 날, 오래전부터 가슴 한편에서만 조용히 꿈틀거리던 작은 로망이 다시 떠올랐다.
‘출퇴근 시골집 작업실.’
말 그대로 출근하듯 찾아가고 퇴근하듯 돌아오는 나만의 작은 집을 갖는 꿈이 있다. 도시의 소음에서 한 걸음 물러나 전원에 숨은 작은 공간에서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멍하니 앉아 있어도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 하루. 누군가에겐 비현실적인 꿈처럼 들리겠지만, 나에게는 오래전부터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단단한 소망이었다.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출 수 있는 곳, 흐트러진 마음의 결을 다시 매만질 수 있는 곳이 그곳이다.
나의 시골집 아침을 상상해 본다. 창문을 열면 먼 산의 윤곽이 부드럽게 펼쳐지고, 습기 머금은 바람이 살며시 방 안으로 스며든다. 커피를 내리고, 노트북을 켜고, 오늘만큼은 서둘러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하루. 도시에서는 늘 시간 앞에서 허덕였다면, 이곳에서는 시간이 내 속도로 흘러간다. 텃밭에 물을 주고, 마른 허브 가지 하나를 쓰다듬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글을 이어 쓰는 삶. 그곳에서 나는 ‘낭만 달팽이’가 되고 싶다. 느리지만 꾸준하게, 자기 속도로 길을 내는 존재.
사소한 것에서 기쁨을 찾고, 작지만 단단한 하루를 쌓아가는 사람. 목표는 더 멋진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슬로우 라이프는 게으름이 아니라, 나를 소모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질주 대신 ‘견디며, 느끼며, 오래 가는 삶’을 선택하는 용기이기도 하다. 바쁨의 반대말은 느림이 아니라 ‘여유’라는 사실을 이제서야 이해한다. 여유는 누군가가 주어야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나하나 덜어내고, 내 속도를 인정하고, 마음에 여백을 남겨두는 선택. 그 선택 끝에 나는 비로소 마주하게 된다. 단순해도 괜찮고, 느리게 흘러도 충분한 하루하루의 삶.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집에서 가까운 시골 집들을 둘러본다. 눈에 띄지 않는 건물과 조그만 공간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공간에 있는 것처럼 조금 느린 하루를 훈련한다. 단순하고 여유롭게, 내 속도로 걸어가는 삶. 곧 생길 시골집 작업실에서 글을 쓰는 그날을 향해, 나는 천천히, 그러나 선명하게 길을 내고 있다. 나만의 낭만 달팽이는 아직 보이지 않는 바다를 향해 천천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