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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변 Nov 29. 2022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니체 철학의 영화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를 뒤늦게 보았다. 인생영화 1위를 단숨에 경신한 세기의 명작이었다. (전 1위는 '루시'... 호불호 갈리는 영화, 뭔 얘긴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평이 넘치는 영화만 좋아하는 홍대병 말기환자)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영화다. 가족영화이기도 하고 SF물이기도 한데 장르 분류는 액션이더라.


그러나 한 마디로 정의해 보자면, 무기력을 극복하는 법에 관한 영화 라고 본다.



내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공상을 많이들 한다. 이 영화는 거기에서 한 발짝 나아가서, "실제로 그렇게 살아 보았다면" 나는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게 될 것인가에 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내게 주어지는 모든 가능성을 전부 다 경험하고 살아내 보고, 다시 제자리 이 시각으로 돌아온다면, 그리고 어떤 인생이든 골라서 살 수 있다면,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비슷한 생각을 많이 해 왔다. 인생이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다 비슷비슷해 보였고 예측가능해 보였다. 내가 아무리 아등바등해도 내 인생은 어느정도 정해져 있는 것이고, 설령 정해져 있는 어떤 한계를 뚫고 큰 성취를 이루더라도 그것이 내 흘러간 내 시간들을 보상해 줄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관해서 고민하게 되기도 한다. 그 고민의 결과는 무기력으로 돌아온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발버둥친다고 해도 인생이 그저 그렇게, 흘러갈 뿐이라면 내가 굳이 목표를 설정해서 고통받을 필요가 있을까?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은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한다고 보았다. 목표를 세워서 노력하는 고통과, 목표 없이 표류하는 권태는 모두 인간에게 존재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할만큼 치명적이다. 쇼펜하우어의 처방은 '금욕'이다. 아무것도 욕구하지 않는 상태가 되면 인간은 고통도 권태도 느끼지 않는다.


니체는 이러한 허무주의가 인간을 망친다고 보고, 고통이든 권태든 그것을 직시하고 용감하게 이를 돌파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방법론으로 여러 가지를 제시하는데 그 중 하나가 현실을 즐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막바지에 이러한 니체적인 해결방법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Cherish 라는 단어로.



깜깜한 영화관에서 나왔을 때 세상이 이전과는 사뭇 달라 보이는 영화를 좋아한다. 평소에 그냥 지나갔던 풍경이 여운이 남아 있는 동안만큼은 달라 보이는 것이다. 그런 영화는 인생에 딱 두 개 있었다. '루시'와 이 영화. 둘은 사실 아주 닮아 있다. 모든 것을 깨달은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라는 이야기다. 결론은 완전히 정반대다. 루시는 무無로 돌아고, 조이와 에블린은 서로를 끌어안는다.


나 개인적으로는, 루시의 결말이 더 맘에 들었다. 더 논리적이라고 해야할까. 더 '통계적으로 개연성' 있어 보였다. 내가 니체주의자라기보다는 허무주의자에 가까워서일지 모른다. 이 영화에서 내 마음을 가장 덜컹하게 했던 장면은 에블린이 별안간 돌로 변해 절벽에서 조이-돌과 나눈 대화였다. 돌로 변하는 장면에서는 그 메타포의 치밀함과 내 생각이 읽혀버린 것 같은 guilty pleasure 에 숨이 막혔고, 이어지는 철학적 대화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이 대화는 루시의 줄거리/문제의식과 거의 다 겹친다. 깔리는 내레이션의 스타일도 루시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아마도 루시를 감명깊게 본 분들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니체는 말한다. "어차피 살 것, 열심히 살아라." 에드먼드는 말한다. "Be K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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