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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영 Feb 04. 2022

주스 갈아주는 당연한 남자

 배고픈걸 유난히 못참는 아빠였다. 자기 배가 고픈데 바로 밥이 준비 되지 않으면 아빠는 엄마에게 화를 내곤 했다. 그러면 엄마는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부랴부랴 아빠의 밥상을 차려야 했다. 자기 배꼽시계에 맞춰서 고작! 밥상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화를 내는 아빠를 볼 때마다 나는 아빠가 미웠고 엄마는 불쌍했다. 늘 그래서 엄마는 부지런했고 손놀림이 빨랐나보다.


 결혼을 하고 시댁에 왔는데 남편의 형 그러니까 나의 시아주버님은 아빠랑 비슷했다. 그래도 우리 아빠보다는 요즘 사람이라 형님에게 화를 내는 정도는 아니지만 제때 밥이 준비되지 않으면 아주버님은 무척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어린 시절 우리 엄마처럼 형님도 아주버님의 밥을 부랴부랴 챙기곤 했다


그 놈의 밥! 밥이 뭐라고. . . .


조금 자라서 알게 된 건 일찍부터 당뇨가 있었던 아빠에게 배고픔이 고통이라는 것이었다. 그걸 좀 일찍 알았더라면 화를 내는 아빠를 조금 덜 미워했을까? (그래도 밉긴 했을 거 같지만) 그런데 당뇨도 없는 아주버님은 도대체 왜 그렇게 밥에 예민할까? 그 이유를 아직도 잘은 모른다. 남자들이란 여자가 밥을 챙겨주는게 당연한 모양이다.




요즘,

애들은 방학이라 늦잠을 잔다.  나도 이때가 아니면 언제 늦잠 자겠나 싶어 늦잠을 자곤 한다. 출근 준비를 하느라 남편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내도 침대에 딱 붙어서 나오지 않을 때도 있다. 어떤 날은 일부러 남편이 출근하며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면 나오기도 한다.  왠지 일어나서 출근하는 남편에게 밥을 차려줘야 할 거 같지만 그러지 못한다. 내 몸이 피곤하기도 하고 겨울엔 정말 늦잠을 포기하기가 어렵다(여름엔 좀 낫지만) .


 오늘 아침에는 그래도 남편이 나가기 전에 눈을 떴다. 나는 뭐 늘 그러하듯이 노트북을 켜고 브런치 창을 열었다. 남편은 주방쪽에서 달그닥 거린다.  남편이 달그락 거리는데 가만히 노트북만 바라보며 자판을 두드려대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주방으로 갔다.  엄마가 싸준 곰국을 데우고 김치를 조금 꺼냈다. 이제 밥만 푸면 된다. 아뿔싸! 밥통을 열었는데 밥통 안에 밥이 한 톨도 없다


"미안해...하하하. 밥이 없네. 어쩌지? 그냥. . 곰국이라도 마셔~ "


 남편은 씩 웃기만 한다.  내가 시킨대로 곰국을 훌훌 조금 마시고 출근한다~


  아침마다 남편은 9가지  과일과 야채를 넣고 과채주스를 손수 가느라 달그락 윙윙거린다.  자기도 한잔 마시고,  나와 두 딸들이 마실 거까지 챙겨서 식탁에 올려 놓고 나간다. 요즘은 거기다 성장기 딸들이 잘 자라야 한다고 단백질 가루까지 섞어서 저어놓고 나간다. 내 꺼에는 콜라겐 가루를 섞어준다(나는 늙지 말라고 그러는 건지).



 제때  밥상을 차려내 놓지 않으면 남편들이란 화를 내는 건 줄 알았다. 아내가 남편의 밥상을 삼시 세끼 제때 차려내 놓는 것이 당연한 도리인 줄 알고 컸다. 어릴적 아빠는 그렇게 당당하게 밥 하나로 엄마를 기죽였었으니 말이다.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는데, 자기 여자들을 위해 아침마다 주스를 갈아주는 남자랑 살아보니 이게 당연한 게 되어간다. 남편의 배꼽시계가 아니라 아내의 배꼽시계에 맞춰 밥을 차려내도 화내지 않는 남자가 당연하다. 이제는 이게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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