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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영 Mar 01. 2022

열아홉 째 생일 축하는 맥주로 치얼스

-한 남자와 19년을 함께 할 줄이야

 2003년 8월 31일 처음 만난 당신과 이듬해 당신의 생일을 축하할 때 이렇게나 오래 당신과 생일 축하를 하게 될 줄 몰랐었어. 올해로 열아홉 번째, 당신의 생일 축하를 하면서 아무것도 바뀐 게 없는 줄 알았는데 참 많은 게 바뀌었다는 걸 알았어.



2006년 2월 당신의 생일을 세 번째로 축하해주던 날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하고 첫 발령을 받아 드디어 돈을 벌게 된 당신 덕분에 처음으로 스테이크를 먹으러 간 기억이 나. 도서관 자판기 커피, 분식집 떡볶이, 어묵만 사 먹던 우리가  왼손 오른손에 장비(?)를 들고 고기를 썬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지. 나이프와 포크를 어느 손에 잡는 게 정석인지 헷갈려하면서도 우린 참 행복했어. 물론  지금 우리는 삼겹살이 더 편하고 맛있어서 삼겹살을 즐겨먹고 있긴 하지



2008년 2월 당신의 생일을 다섯 번째로 축하해 주던 날

결혼식 직전 사랑 가득 차린 생일 상

 결혼을 보름 앞두고 13평 주공아파트에서 나는 복작복작 당신을 위한 생일 상을 차려냈지. 팬케이크를 굽고 생크림과 딸기를 올려 핸드메이드 케이크도 만들고, 오징어를 볶고, 닭고기를 갈아서 배추에 싸서 닭고기배추쌈말이를 하고,  예쁜 카나페까지~~(네이버 레시피가 많은 걸 도와줬어).  새로운  결혼 인생을 시작하는 설렘과 사랑을 조미료로 팍팍 뿌려주면서 한상 가득 차려냈어.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영원한 사랑과 행복한 결혼을 맹세했지.



2010년 2월 당신의 생일을 일곱 번째로 축하해 주어야 했던 날,

2월 남편 생일을 잊어버리게 한 1월에 태어난 아기

 나는 정말 까맣게 당신의 생일을 잊고 말았지.  아직 열 번도 못 채웠는데,  일곱 번 만에 그렇게나 새까맣게 당신의 생일을 잊어버릴 줄이야.  첫아기를 낳는다는 건 그런 거였더라고,  남편의 생일도 새까맣게 잊어버릴 만큼 정신없는 것, 그리고 나의 신경이  온통 아기에게로 집중되는 것! 그날 이후로 당신이 서운해하는 날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지.


2016년 2월 당신의 생일을 열세 번째로 축하해 주던 날

  목디스크로 시작해서 허리디스크, 무릎에 발가락 통증. 하다 하다 이제는 안구에 물이 차서 앞이 잘 안 보인다고까지 했을 때 나는 좀 무너졌지. '도대체 이 남자 어디까지 아프려고 그러는 거지?', '난 어쩌라고..'  결국 당신은 휴직을 선택했고 나는 실질적인 가장이 되어 억척스러운 여자의 인생길로 들어서야 했어.  애들이 아직 학교도 안 들어갔는데, 아빠는 맨날  아프고 돈은 없고 내 인생이 가장 불행한 것만 같았단 말이야.  그래서 생일날에 케이크를 놓고 촛불을 부는 행위도 무의미한 것만 같았어. 그래서 5천 원짜리 치즈케이크 하나를 사다가 초만 꽂고 후~ 그냥 꺼버린 듯해.


2020년 2월 당신의 생일을 열일곱 번째로 축하해 주던 날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지 며칠 지나지 않은 날에 찾아온 당신의 생일을 '하하호호'하려니 왜 그렇게 미안하던지. 그래도 당신의 생일은 축하받아야 마땅한데 말이야. 미역국을 끓이고 적당한 선물과 쪽지를 나누면서 우리는 또 조용히 그날을 지나갔지.



2022년 2월 28일 당신의 생일을 열아홉 번째로 축하하게 되었어.

그럼 내년이 스무 번째야? 당신과 내가 20년을 함께 했다고? 몰랐네. 이렇게나 오래 당신과 함께 한 줄은. 숫자를 세어보다가 나도 깜짝 놀랐어.  20년씩이나 한 남자를 끌어안고 살게 될 줄은 정말 몰랐거든. 나는 그렇게 지고지순하게 한 남자만 사랑하는 여자는 못 되는 줄 알았거든. 언젠가 티브이에 이효리가 나와서 그러더라고, 자기는 결혼을 하면 바람을 피울까 봐 결혼을 못할 것 같았다고. 그런데 이상순하고 그렇게나 잘 살게 되더라고. 그런 건가 봐.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렇게 살아지나 봐. 그러니까  내가 뭐 지고지순 열녀여서가 아니라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난 덕분으로 이렇게 열아홉 째로 생일을 축하할 수 있게 된 건가 봐. 그러니 이번 생일엔 맥주로 치얼스!




맨날 제자리에서 그날이 그 날인 것만 같았다.  별로 바뀐 것도 없고, 오히려 지지리 궁상의 나락으로 빠져 드는 것만 같은 날들이었다. 내 욕심만큼 되는 게 아무것도 없는 날들이었다. 집도, 남편도, 아이도, 뭐하나...

 특히나  남편이 아프던 그때에는 내가 가장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는 여자인 것 만 같아서 이별하고 싶었다. 이별하자고도 했었다. '남편이 아프니 버리냐'는 시누이의 말을 들으며 나는 울어야 했고, 다시 주저앉아 발버둥을 쳐야 했다.  모든 게 다 지나가기만 하는 건 아닌데... 다행히 잘 지나갔다.

 남편은 건강해졌고, 나는 좀 단단해져서 이제는 내가 좀 잘 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니.. 이제는 남편이 나와 제일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걸 보니. 열아홉 번씩이나 생일 축하를 한 보람이 있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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