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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영 Oct 06. 2022

시가 필요한 나이

 나에게 시집은 중학교 2학년 때 좋아하는 남자아이에게  볼이 빨개지게 건네던 풋사랑이고, 대학교 2학년 동아리에서 만난 선배가 나에게 건네던 짝사랑의 징표 같은 감성이 있다. 그렇게 내 인생에서 두 장면 정도에 시집이 등장한다.

   이후로 내 삶은 시, 낭만, 사랑 이런 것을 생각하며 살기엔 너무도 바빴고, 아등바등 이었다.  


  대학원 마지막 학기였던 스물다섯의 나는 운명처럼 스물여덟의 공학도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어떤 나이보다 예쁘고 피 끓는 사랑을 할 수 있는 나이였다. 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안정적인 직업을 찾고 내 이름 앞에 그럴듯한 직업명을 새기는 문제가 더 시급한 취준생이었기에 사랑과 낭만은 두 번째 문제였다. 그래서 남편(그 당시 남자 친구)과 나의 사랑은 달달함이나 뜨거움보다 불안한 청춘들의 상호 위로의 감정이 더 컸던 거 같다. 함께 도서관에 가서 시험공부를 하며 밥 메이트를 하고 진로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동지애를 많이 나누었다. 그런 우리 사이에 '시'를 나눌 낭만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건축을 전공하는 공대생이었던 남편에게 시는 배부른 베짱이의 노랫소리 같은 것일 뿐이라고 지레 생각했다. 남편이라는 사람은 지극히 이성적이고 수학과 설계에 능한 그런 사람일 거라도 생각했다.  

  결혼을 했고 14년을 사는 동안 남편이 시집을 본다거나 문학작품을 읽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남편과 나는 과연 어떤 감성의 접점이 있을까를 고민하는 시간도 있었다. 건축직렬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그가 즐겨보는 것은 나로선 도저히 해석이 불가하는 도면들과  두텁기만 한 서류들 뿐....




 그러던

 그가 나에게 책을 선물했다. 그것도 제목에 '시'가 들어가는 책을 말이다.


지극히 좌뇌형의 이성적인 사람이라 시를 읽는 감성이 파고들 틈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했던 그가 나에게  이런 책을 선물하다니! 내 인생에 시집이 등장하는 세 번째 장면을 남편이 만들어주었다.


 정재찬 <시를 잊은 그대에게>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책의 뒷면에 이런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지독히  외로운 날,
우리에겐 시가 필요하다


 

  이제 인생의 절반 즈음은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이렇게 쓰니 나이가 엄청 많게 느껴짐). 5년의 연애를 종식하고 결혼을 해서 가족공동체를 이룬 남편과 나는 경제공동체로서도 열심히 협력하며 살아왔다. 각자의 밥벌이 현장에서 누구보다 성실하게 제 할 일을 해나가며 빈틈없이 살아왔고 여전히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두 아이를 독립시키는 그날까지 이렇게 살아가겠지? 아직 먼 것도 같다.


   그런데  요즘 문득 남편과 자주 하는 말, 인생이 너무 빠르다. 외롭다. 외로움이 툭하고 우리 앞에 찾아온 나이. 남편은 이제 나와 함께 시를 읽어야겠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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