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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영 Jan 14. 2022

요즘 빨간 머리 앤을 읽는 이유

  "신승훈 꺼 사다주라니깐! 아니면 최신 가요 모음 이런거 있잖아~ 그거 하나 사다주면 안되냐고, 맨날 지껏만 사냐?"


 토요일 오후 시내에 나간다는 오빠에게 나는 신승훈  테이프를 하나 사다 달라고 했다. 그러나 돌아온 오빠의 손에는 어김없이 '팝송 카세트 테이프'뿐이었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외국가수들 테이프는 나에게 그닥 흥미롭지 못했다. 동생 부탁은 신경도 안쓰는 오빠가 얄미웠고 왜 자꾸 팝송을 듣는 건지 이해가 안되기만 했다.


 카세트 테이프로 음악을 듣던 중학교 시절 이야기다. 오빠는 땅거미가 내려앉는 오후 6시쯤이 되면 자기 방으로 들어가  공부를 하는 게 아니고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꼭 챙겨듣던 사춘기 사람이었다.  은근히 가요를 무시하며 팝만 듣고 좋아했던 오빠는 신승훈이나 이승환을 좋아하는 나를 무시할 때도 있었다. 마치 자기가 굉장히 심오한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유일하게 015B는 같이 좋아함).


  오빠가 기숙형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면서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어른이 되어 오빠에게 들은  바로는 기숙형 고등학교를 선택한 이유가 아빠하고 떨어져서 마음편히 음악을 듣기 위해서였다고).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도 오빠는 여전히 음악에 빠져 있었다.  방송반 활동을 한다고 했다. 매일 매일 자기가 음악을 선곡하는게 정말 행복하다고 했었다.


  대학에 가고 군대에 간 오빠가 휴가를 나올 때 오빠손에는  LP판이 들려 있었다. 나는 그때도 '저걸 왜 사왔을까?' 생각했다.  휴가 나온 사람이 저걸 구하려고 서울 어디를 뒤지고 다녔다고 했다. LP판을 돌리는게 아니라 CD를 듣는 시절인데 오래된 LP판을 구해오는 오빠가 나는 정말 이상해보였지만 한편으론 그런 마니아적인 취향이 부러웠다. 나는 그런 취향이 없는 거 같아서.

  

  이후로도 오빠는 계속 그런류들을 사서 쟁여갔다.  LP판, CD.

 그 다음엔 소설, 문학계간지 등등.



   

 하루는 오빠가 아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음악을 하겠다고 했다. 그때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해야 했던  즈음이었던 거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공대가 제일 취업하기 좋다고 했고, 오빠는 전기공학과를 다녔다.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오빠가 한전에 들어가면 제일 좋을 것이고 한전이 안되면 다른 공기업이라도 들어가는 게 좋다고 아빠는 생각했다. 그런 오빠가 난데 없이 음악이라니... 아빠는 밥상을 엎었고, 화를 참지 못했다.


  오빠는 한전엔 못들어 갔지만 다른  공기업에 들어갔고, 지금은 높은 직급의 사람이 되었다.  음악은 못하고 살지만 여전히 자기 서재에 작은 음악사를 차려놓고, 음악을 듣고  문학을 읽으며 산다.


 "OO이는 나를 닮은 거 같애. 주말에 서점가자고 하잖아? 그러면 당연히 간다고 해. 근데 서점도 광화문 교보문고 같은데 있잖아~ 큰데로 가자고 한다. 책 많이 있는 곳이 좋단다."

 

  오빠는 자기 딸이 책을 좋아하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무척 흐뭇해한다. 그리고 자기를 닮아 아이가 감성적인 것 같다고 이야기 한다.  글을 잘써서 그림을 잘 그려서 보다 자기를 닮은 감성을 가진 딸이 이해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딸의 꿈을 존중해주고 지지해준다.






  10대의 감성은 흐려지고 현실적인 밥벌이를 하며 세상 풍파에 맞서 살아가다보면,  취업 대신 배고픈 음악을 하겠다는 아들 앞에서 밥상을 엎어버렸던 그 옛날 우리 아빠같은 사람이 되어 있기도 한다.  그래서 내 아이에게 돈벌이가 잘되고 안정적인 직업군을 꿈이라며 제시하는 부모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런 부모가 너무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이의 감성을 존중해주고 아이의 꿈을 인정해주는 멋진 부모가 되고자 한다면 내 감성부터 챙길 일인 거 같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빨간 머리 앤'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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