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스트레스 없는 마흔 넘은 여자

낯설은 한가함에 관하여

by 진영

설 연휴가 시작되었는데 갈 곳도 없고 할 일이 없다. 마흔 살을 넘긴 결혼한 여자가, 애가 둘이나 되는 여자가 이렇게 한가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다. 대한민국 며느리로서의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사람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명절만 되면 만두를 몇 백 개씩 빚는다는 친구도 있고, 시어머니가 그릇을 씻고 나서 꼭 마른행주로 닦으라고 해서 짜증이 난다는 친구도 있는데 나는 좀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릴 적 내가 보아온 명절은 늘 바빴다. 특히 겨울철 설 명절이 다가오면 엄마하고 할머니는 먼저 술을 빚었다. 사서 먹는 술과는 비교가 안 되는 그런 술이라고 했다. 그다음은 한과와 약과를 만들었다. 아이들 먹을 식혜에다가 수정과에 약밥까지 도대체 집에서 안 만들어지는 게 없을 정도였다. 가래떡은 미리 빼다가 칼로 썰기 좋을 정도로 꾸덕하게 말려서 일일이 칼질을 해서 떡국용으로 썰어두었다. 설 연휴 기간이 3~4일이어도 우리 집에서는 최소 20일 이상은 설 명절을 준비한 듯하다. 어린아이였던 나는 설날에는 떡국을 든든하게 먹고 따뜻한 방에 그냥 드러누워 TV에서 해주는 설특집 영화를 보거나 오락프로를 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설날 아침 상차림을 마치면 치우기가 무섭게 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한 팀도 아니고 여러 팀이 동시에 인사를 오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동네에서는 유지여서 그랬던 거 같고, 집안으로 따지면 할아버지와 아빠는 모두 장손이었다. 그러니 할머니와 엄마는 한가할 틈이 없이 그렇게 바빴다. 결혼을 한 여자의 입장에서 시댁의 이런 분위기는 너무 힘들었겠다 싶은 생각을 이제야 조금 하지만, 어린 날의 우리 집 설날은 늘 먹거리가 풍성했고 사람 냄새로 따뜻했다.


그래도 맏며느리였던 엄마는 힘들었는지 내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절대 큰 아들에게는 시집 안 가면 좋겠다고 종종 이야기했었다. 엄마의 말은 씨가 되었다. 나는 늦둥이 막내아들과 결혼을 했고, 시아버지까지 집안의 막내인 집으로 시집을 갔다. 결혼을 하고 겪는 명절은 낯설 정도로 한가했다. 결혼을 하고 나니 오히려 명절날 아침에 늦잠을 자도 괜찮았다. 일찍 일어나서 할 일이 없었다. 결혼 전에는 다리에 쥐 나게 전 부치는 엄마를 돕느라 내 다리가 저리기도 했었는데, 결혼하고 나니 전을 많이 부칠 일도 없었다. 시댁에서 부치는 전은 아무것도 아닌 양이었다. 명절날에는 당연히 조상님들 산소에 성묘를 하는 우리의 미풍양속을 꼭 지키는 거라고 아빠에게 배우며 자랐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 아침에 떡국 간단히 먹고 영화를 보러 갔다. 그렇게 나는 결혼을 하고 12년 동안 명절 스트레스라고는 모르고 지냈다. 너무나 허전하리 만큼. 이런 나를 두고 명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친구는 부럽다고도 했지만, 나는 그 친구가 부러웠다.


혼자 계시던 시아버지께서 2년 전 돌아가셨다. 시아버지까지 안 계시다 보니 갈 시댁이 없다.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형님네 집으로 가는 게 맞는데 (전라도) 광주에서 (경기도) 시흥까지 멀기도 멀고, 코로나는 핑계가 되어버렸다. 시아버지 계실 때는 아무리 멀어도 4시간씩 걸리는 운전을 꼬박해서도 젖 먹는 아이를 데리고라도 꼭 올라가는 건 했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안 하니 정말 할 일이 없다.


갈 데도 없고 할 일이 없어서 그럼 우린 제주도라도 갔다 올까 그랬더니, 친정 아빠가 부른다.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가서 성묘를 하란다. 아무래도 친정에 가서 며칠 지내다 와얄까보다. 올케언니들 안 힘들게 설거지 잘 도와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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