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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꿈이네 Jun 05. 2023

맥주 맛이 쓴 건지. 인생이 쓴 건지 #1-13

아파트 잔금 친 다음 날, 하락장이 시작되었다 1-13

* 본 시리즈는 2019년~2023년에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7살까지 대전역 근처 중앙시장 한복판에 있는 건물의 4층 옥탑방에서 자랐다. 90년대에 엘리베이터가 있었을 리 없다. 늘 숨을 헐떡이며 계단을 올랐다.


건물 꼭대기 옥상에 마당도 있고 방도 있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우리 집은 아마 옥상 가건물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이후에는 대전 끄트머리 동네 주택에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 못 사는 동네다. 요즘에야 “초품아”가 당연시 여겨지지만 그때 나는 학교까지 20분을 걸어갔다. 등교는 20분. 하교는 2시간. 돌아오는 길에 문방구에서 부탄가스에 쫀득이도 구워 먹고 오락도 했어야 하니까.


그래도 그 주택에서의 기억은 좋은 기억뿐이다. 우리 가족이 살았던 집 중에 가장 넓은 집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좋은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

.

.


“2003년 카드대란”


집에 있으면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화가 많이 걸려온다. 끊임없는 전화벨 소리에 아빠 엄마의 한숨도 끊이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 알게 되었는데, 아마 우리 집이 “2003년 카드대란”의 주인공이었던 것 같다.


이 사건으로 형편이 어려워진 우리 집은 단칸방으로 바뀌고 만다. 또 다른 못 사는 동네의 가게가 딸린 단칸방으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단칸방에서 우리 가족은 새 시작을 다짐한다.


그럼 이후에는 형편이 좀 나아졌을까?


그럴 리가.

오히려 계속되는 돈 문제로 부모님은 매번 싸우기만 하셨고, 나 역시 갑자기 변한 가정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결국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잘 다니던 고등학교마저 중퇴하게 된다. 이렇게 나의 청소년기는 더욱 암흑에 빠지게 되었다.

한 번은 군대 휴가를 나왔는데 집이 바뀌어 있던 적도 있다. 몇 번의 이사를 다녔는지 이제는 셀 수도 없다.


이렇게 우리 가족은 늘 세입자로서, '을'로써, 남의 집에서 전월세를 긍긍하며 살아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에 들어서야 부모님이 '내 집 마련'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더 꺼내온다.

치익- 똭. 꼴깍 꼴깍.




내가 지금 불안한 이유에 대해 혼자 정리해 본다.


부모님과 다르게 어린 나이에 내 집 마련을 서두르려 하려는 것, 30년 동안 이 큰 대출금을 갚아나가야 한다는 것, 살면서 이렇게 큰돈을 취급해 본 적이 없다는 것, 매번 덜렁거리는 나인데 계약할 때 뭐 하나 빠뜨리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을까 하는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더군다나 카드 빚으로 한번 망해본 부모님은 늘 나에게 "대출은 나쁜 거야."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거기에 이제는 '가장'이라는 타이틀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혼자서는 생각의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 나름 정보라도 얻어보기 위해 유튜브를 틀어본다.


예전에는 유튜브로 매번 산적같이 생긴 형이 고기 구우면서 '술 먹방'하는 동영상만 봤었는데, 오늘은 유튜브에 '내 집 마련'을 검색해 본다.


많이 컸군.



동영상 참 많기도 하다.

어떤 동영상을 봐야 하나..




그때, 꽤나 자극적인 썸네일의 동영상이 눈에 들어온다.



 

“절대로 전세 살지 마라.”

 


 

클릭.

딸깍.




절대로 전세 살지 말라니. 꽤 충격적인 동영상이었다.



안 그래도 쓰게 느껴졌던 맥주가 더 쓰게 느껴진다. 유튜브 보는 사이에 누가 소주라도 섞었나.



그동안 ‘전세’라는 것은 ‘내 집 마련’을 하기 전 돈을 모을 수 있는 좋은 거주 형태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뭐?


내 전세금을 집주인에게 무이자로 빌려주는 것과 같다고? 더군다나 나는 전세 대출까지 받아서 매달 이자까지 내고 있는데.



그럼 그 뜻은..

내가 집주인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집주인 대신 이자를 내주고 있었다는 이야기?



'이런 씨.. X'



갑자기 1년 동안 냈던 전세 대출 이자가 아까워지기 시작하며 열이 받는다. 남은 맥주를 원샷하고 빈 캔을 사정없이 구긴다. 캔이 일그러지는 소리가 꼭 내 기분을 말해주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전 집주인.

지금 이 집을 2억 1100만 원에 샀고, 내 전세금이 1억 8000만 원 있었으니 3100만 원으로 이 집을 샀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 이 집을 2억 7800만  원에 매도했으니 1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에 6700만 원을 벌고 떠났다.


내 전세금을 이용해서 본인 돈은 3100만 원밖에 들이지 않고 6700만 원을 번 것이다.

 

도대체 수익률이 몇 프로인 것인가.


그동안 주식으로 돈 조금 벌었다고 와이프에게 큰소리치던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부끄럽다. 이렇게 집으로 돈 버는 방법이 있는 줄은 몰랐다.



‘나는 그동안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았을까.. 왜 아무도 나에게 이런 돈에 관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은 걸까. 진작 알았더라면.. 아니다. 그냥 처음에 와이프 말 들을걸. 그랬으면 지금 와이프 눈치도 안 보이고 우리 자산도 더 늘어나 있었을 텐데.. 씨..X’



오늘따라 육두문자가 입에 착 달라붙는다.

제철 과메기처럼.



맥주 두 캔에 취할 내가 아니지만 왠지 얼굴이 화끈거린다. 스스로에게 창피하고 자존감 떨어져서 그런거라고 인정하기는 싫다. 그냥 오늘따라 컨디션이 안 좋아서 술에 취했다고 믿고 싶다.



널브러져 있는 맥주 캔들을 정리한 뒤 방으로 들어간다.



와이프가 쌔근 쌔근 자고 있다.


zZ



오늘도 신혼 초에 사준 이케아 상어 인형을 꼭 껴안고 자고 있다. 이럴 때 보면 꼭 초딩같다. 자고 있는 와이프 모습을 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그동안 몰랐는데 생각해 보니 나랑 결혼해서 고생만 하고 있는 것 같다.



애초에 넉넉한 집안에 시집갔으면 시댁에서 집 하나 정도는 사줘서 이렇게 전셋집 살지 않아도 될 텐데.


능력 좋은 남편 만났으면 매일 아침 눈도 못 뜨고 허겁지겁 출근하는 일은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아니 그냥 말 잘 듣는 남편이라도 만났으면 신혼 초에 이미 집 사서 돈도 많이 벌고 지금 이런 고민 같은 거 안 해도 됐었을 텐데.



미안함과 고마움에 자고 있는 와이프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손도 잡아보고 손등에 입맞춤까지 해본다. 그리고 살포시 옆에 드러눕는다.



시간을 보니 벌써 새벽 1시다. 알람을 맞추고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아 놓는다.

이제 진짜 자야겠다.



살며시 눈을 감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야 깜짝이야. 와이프다.


 

“내일 부동산 전화해서 어제 본 그 집 2억 9000만 원에 매수하겠다고 한번 조율해 봐 여보.”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깨어 있었다.



그랬다. 와이프도 잠에 들지 못하고 계속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 둘은 같은 밤 다른 공간에서 첫 내 집 마련을 고민하고,


같은 침대에서 첫 내 집 마련을 결심하게 되었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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