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 정복기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평소와 다름없이 와이프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간다. 평소 같았으면 경제 관련 유튜브를 들으며 퇴근길을 함께 했겠지만 오늘만큼은 그냥 노래를 듣고 싶다.
가을이 오긴 오는 건가. 괜히 쎈치해진다.
유튜브 추천곡들을 틀어본다. 왁스 노래네.
"관계", "황혼의 문턱"
처음 들어보는 노래지만 빗줄기와 제법 어울린다. 와이프도 옆에서 "어? 이 노래 뭐야? 완전 좋아" 하며 좋아한다.
어두컴컴한 날씨에 무심한 듯 떨어지는 빗줄기, 앞차의 새빨간 후미등이 한데 어우러져 우리의 퇴근길 감성을 자극한다. 그렇게 왁스의 콘서트가 끝나고 다음곡이 흘러나온다.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
비교할 수 없는 설렘
.
.
.
그대는 너무 달라요,
내가 본 어느 눈빛보다 날 기대하게 해
언젠가 날 너무나 감동시킬 것 같은 고백이 있을 것 같아.
언제부턴가 기다려
https://youtu.be/SAAAAm44kQE?si=mqeu05M1xdRIMMkb
어렸을 때 듣던 한예슬의 그댄 달라요가 차 안에 울려 퍼진다. 와이프와 그 시절 감성에 조금 빠져본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고 와이프는 씻으러 들어간다.
욕실에서 한예슬에 빙의된 와이프의 그댄 달라요가 울려 퍼진다. 학창 시절 감성에 흠뻑 젖어있는 모양이다. 욕실 배관을 통해 윗집과 아랫집에도 그댄 달라요가 배송된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하려는데 와이프가 냅두라고 한다. 본인이 설거지하겠다고. 설거지하는 와이프의 식도에서 한예슬의 그댄 달라요가 흘러나온다. 싱크대 배수구로 또 한 번 이웃 주민들에게 그댄 달라요를 투척한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고. 여전히 한예슬의 그댄 달라요가 온 집안에 울려 퍼지고 있다.
이틀 뒤 이마트 트레이더스로 장 보러 가는 차 안.
오늘은 노래를 틀지 않을 예정이다. 뭐 하나에 꽂히면 계속 그것만 흥얼거리는 와이프 때문에.
차 안이 너무 조용했는지 와이프가 노래를 한 곡 하기 시작한다.
살짝 움켜쥔 주먹을 가슴팍에 올리고. 머리 한쪽을 귀 뒤로 넘기고. 가성 부분에선 고개까지 갸우뚱해가며 열창을 한다.
"그대는 너무 달라요↗, 날 빠져들게 만든 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와이프에게 한마디 한다.
"내가 그 노래 머릿속에서 지워줄까?"
"어떻게?"
기다려봐.
휴대폰으로 중독성 강하고 상큼 발랄한 노래를 찾아본다.
그래 이거다.
https://youtu.be/ZuyNe3AmlSk?si=h9X-kELL-KWKKH2W
악동뮤지션의 I love you.
와이프가 콧방귀를 뀐다.
이런다고 본인이 여기에 빠져들 것 같냐고.
본인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출근시간.
와이프가 머리를 말리며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 하나하나에.. 들 었다 놨 다해..~"
"알러 뷰우우, 사랑해 요오오, 널 보는 날이면 둘만 만나는 날이 아닌데 도오오~~"
이야 무의식이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와이프가 악동뮤지션의 I love you를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노래 가스라이팅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를 “무의식의 중요성”이라는 주제로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는데.
뒤에서 섬뜩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와이프 그대는 진짜 다르긴 달라요. 얘 아직도 그댄 달라요 지옥에서 못 벗어났네.
급하게,
쓰고 있던 블로그 글의 제목을 수정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