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데이트, 나는 ..
* 본 시리즈는 2021년에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여보! 이 옷이 나아, 아니면 이 옷이 나아? 이건 너무 화려해 보이나? 그렇다고 이건 좀 후줄근해 보이지? 머리는 어떻게 할까? 묶어? 그래. 오늘은 묶어봐야겠다. 아 근데 오늘 얼굴이 왜 이래? 뒤트임 하고 싶어지네. 아오 주먹으로 거울 한 대 치고 싶.."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와이프는 혼자 질문하고 혼자 대답한다. 그러다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하고 가끔 열을 내기도 한다.
조용히 귀를 닫고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나는 보살이다.. 나는 보살이다.. 그녀가 1시간째 외출 준비를 해도 나는 괜찮..다..'
아야.
"내 말에 집중해. 안 그러면 나 오늘 안 나가."
얼른 와이프의 외출 준비를 끝내줘야 한다.
그래야 임장을 갈 수 있다. 갭 3000의 천국 청주로.
위기의 상황에서 분비되는 뇌 신경 물질인 노르아드레날린이 최대로 분비된다. 노르아드레날린은 단기간에 집중력을 끌어올려주는 효과가 있다.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코칭을 시작해 본다.
"이 옷은 너무 현란해. 특히 어깨 부분. 무슨 날개 달린 것 같아. 갖다 버리고, 음 이게 좋겠네. 적당히 달라붙는 흰색 티에 나팔 모양 청바지. 거기에 신발은 골든구스로 마무리하자고."
와이프가 흡족한지 씨익 웃는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저 미소.
한 시간에 걸친 외출 준비가 모두 끝났다.
드디어 현관 밖으로 나간다.
삑삑-
"공주님 타시지요"
골든구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흰색 아반떼에 와이프가 올라탄다.
[충북 청주시 흥덕구 복..]
네비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우리는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채 청주시로 출발한다.
와이프는 데이트.
나는 임장.
아반떼가 매서운 소리를 내며 출발한다.
이 녀석도 오늘 신이 나는지 컨디션이 좋아 보인다.
우걱 우걱
찹찹
호로록 호로록
보그르르르르 춉춉
"아니 무슨 브런치를 그렇게 이삭 토스트 먹듯이 먹어? 나이프로 이렇게, 이렇게 예쁘게 썰어서 천천히 먹어야 한다고.. 그리고 그 콜라 좀 보그르르 소리 내면서 끝까지 먹지마..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헤헤, 알겠어~ 너무 맛있어서 그랬지! 그리고 콜라는 이렇게 끝까지 춉춉 먹어야 뭔가 맛있어 보인다구. 그나저나 부족한 거 없어? 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시켜. 내가 산다!"
와이프가 허기지면 안 된다. 배불러야 한다.
나에게는 다 계획이 있기 때문에.
"후 잘 먹었다. 배불러. 이제 나갈까?"
와이프가 배가 부른 가 보다. 다행이다.
"5만 6천 원 나왔습니다."
5만 6천 원이면 국밥이 몇 그릇이지. 이런.
그래도 오랜만에 와이프가 분위기 좋은 곳에서 예쁘게 먹는 모습을 보니 기분은 좋다.
큼큼.
이제 슬슬 와이프에게 본색을 드러낼 차례다.
"아~ 진짜 배부르다. 여보도 엄청 배불러 보인다. 임산부 같아ㅋㅋㅋ 우리 좀 걸을까? 배불러서 도저히 어디 못 앉아 있겠다."
"좋아! 배 좀 꺼뜨리자."
나잇수. 와이프도 걷고 싶은가 보다.
"여기로 이렇게 해서 저 아파트 단지 사이로 걸어보자. 나 요즘 부동산에 관심 많잖아! 한 번 슥 지나가보자고."
시나리오 완벽했다. 와이프를 임장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인도하는데 성공. 역시 전지전능한 나란 남자.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터벅
"여보, 이 동네는 어떤 사람들이 살 것 같아?"
와이프에게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져본다.
와이프는 별 관심 없다는 듯 대꾸한다.
"그걸 뭘 물어봐. 딱 봐도 저렴하게 전세 찾는 직장인이나 신혼부부들이 많아 보이는구만! 살기는 좋아 보이네. 그런데 다 평수가 작아 보여. 조금 살다가 다들 다른 곳으로 이사 가겠는데?"
어랍쇼.
와이프가 하는 이야기들은 책에서 나오는 내용들이 아닌데 어딘가 모르게 설득력이 있다. 책에서는 입주 물량, 전세가율, 유모차 개수 같은 거만 나왔었는데.
부동산 책이라고는 읽어보지도 않은 와이프 말이 틀리겠지 뭐. 역시 귀엽긴 하다니까. 혼자서 이것저것 생각도 할 줄 알고 다 컸다 다 컸어.
"여보!!!! 나 이제 좀 힘들어. 그만 걷자!"
와이프의 인내력이 한계에 다 다랐나보다.
아파트 단지에 잠시 앉아 있을만한 곳을 찾아본다.
쩝. 마땅치 않네.
두리번 두리번.
[성실 중개 책임중개. 일단 들어오세요]
[상복대 부동산]
"여보. 저기다. 저기 들어가서 잠깐 물도 좀 마시고 쉬었다가 가자. 일단 따라와봐."
덥석.
쨍그랑-
"어서 오세요, 집 구하러 오셨어요? 어머~ 신혼부부인가 봐요? 너무 보기 좋아요!"
"네.. 집.. 좀.. 보려구요..."
이 썩을 놈의 부동산만 오면 왜 이리 작아지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며칠 전 다녀왔던 대전의 공시지가 1억 이하 아파트 부동산 아줌마 때문인 것 같다. 그때 제대로 면박을 당했으니 내가 이렇게 또 작아지지.
"어떤 거 찾으세요?^^ 전세? 매매? ^^"
부동산 아줌마들은 늘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꼬리의 꼬리를 무는 질문들.
아직 기가 많이 죽어있는 나지만, 와이프 앞에서 기죽은 모습을 보일 순 없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능숙하게, 투자자처럼 보여야 한다. 어리바리 했다간 난 끝이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를 있는 힘껏 누르며 남자답게, 씩씩하게 대답한다.
와이프가 나에게 홀딱 반했는지 나를 한 번 올려다본다. 부동산 아줌마도 내가 투자자처럼 보였나 보다.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간다.
"아~ 투자하러 오셨구나! 잘 오셨어요. 그런데 어디서 유명한 사람이 청주 찍어준 거예요? 아까도 대전에서 투자자들 몇 팀 왔다 갔는데.. 며칠 전에 누가 카톡방에서 저평가라 했다고.."
홀리쒯. 한발 늦은 거 아니겠지.
벌써 몇 팀이나 왔다 갔다고?
그래도 이 아줌마는 나를 투자자로 인정해 주는 것 같다. 누군가가 나를 인정해 주니 신이 나서 미칠 것 같다.
"네 맞아요. 그 투자자들 톡 방에 저도 있어요. 저도 그거 보고 왔네요"
"투자금은 얼마 정도 있으세요?"
나에게 대놓고 투자금을 묻는 부동산 아줌마. 3000만 원이라 말하기는 약간 자존심 상한다. 또 돈 없는 취급 받을까 봐 겁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차피 안 산다 하면 그만이니 가진 돈을 조금 뻥튀기해서 이야기해본다.
"1억까지는 가능해요."
와이프가 다시 한번 나를 올려다본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눈빛이 조금 다르다. 왜 거짓말하냐는 눈치.
자상하던 부동산 아주머니의 눈썹도 살짝 내려간다. 어딘가 의아하다는 저 표정.
"그 돈으로 왜 여길 투자해요? 여기는 1~2천으로 투자하는 곳이에요ㅎㅎㅎ 일단 투자하러 오셨다고 하니까 집 하나 보여드릴게요."
민망하다. 저 아줌마 말이 맞다.
1억이 있으면 다른 곳을 투자하지 왜 여기에..
이번에도 한 수 배운 듯하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