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가서 그러지 마세요.
* 본 시리즈는 2021년에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자, 이 동네는 보시는 것과 같이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살아요. 근처에 대기업도 있기 때문에 회사 기숙사로도 많이 계약이 되고 있는 곳이에요. 초등학교도 바로 옆에 있어서 신혼부부들이 아이 키우며 살기도 좋구요. 다만 단점이 하나 있다면 작은 평수로만 구성되어 있고 중학교는 거리가 좀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조금 크면 다른 단지로 이사를 많이 가더라구요."
부동산 아주머니가 단지를 거닐며 친절하게 이 동네에 대해 브리핑을 해준다.
그런데 이 이야기.
어디서 한 번 들어본 것 같다.
아까 부동산에 들어가기 전에 와이프가 이야기했던 것들이다. 와이프는 책도 안 읽으면서 이런 걸 어디서 배운 건지.
와이프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오늘 살펴볼 집에 도착한다.
"이 집이에요. 지금은 공실이고 집주인이 입주 전에 인테리어 할 시간도 준다고 하니 투자하기 딱 좋은 집이에요. 저층이긴 하지만 지금은 저층마저 귀해요."
와이프와 집 안을 한 바퀴 둘러본다. 집은 깨끗하지만 벽지와 문짝, 샷시, 몰딩까지 모든 것이 낡아있다.
'이 집은 전세 놓으려면 인테리어 비용 꽤나 들어가겠는데..'
내 생각을 읽었는지 부동산 아줌마가 이야기한다.
"인테리어는 세입자용 인테리어로 가성비 좋게 하면 될 것 같아요. 욕실이랑 싱크대, 도배장판 정도만 하면 세는 잘 나갈 거예요."
크음. 할 말이 별로 없다. 더 이상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이대로 소심하게 돌아가기엔 자존심이 상한다.
그냥 확 계약금 넣어버릴까.
"총각? 총각!"
잠시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 부동산 아줌마가 나를 부른다. 결혼해서 버젓이 와이프도 옆에 있는데 웬 총각 타령.
"네?"
"이 집 계약 안 해도 좋아요. 그런데 경험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제가 설명 한 번 해드릴게요."
역시 경험이 별로 없는 것은 다 티가 나나보다. 그래도 이 부동산 아줌마는 친절하다. 다른 곳들처럼 사람을 무시하지도 않고 진심으로 대해준다.
"총각이 만약 계약을 하겠다고 하면 우선 이 집의 집주인과 잔금 날짜를 협의할 거예요. 그 조건이 마음에 들면 총각은 계약금을 넣고 계약이 성사되는 거죠. 그리고 잔금 날짜에 맞춰 저희는 세입자를 구할거구요. 세입자는 잔금 날에 전세보증금을 총각에게 줄 거고 총각은 그 돈으로 이 집 잔금을 치르면 되는 거예요. 이게 갭투자의 과정이랍니다."
몇 년 전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저 신혼 전셋집 얻었다고 좋아한 철부지였던 나.
전셋집 잔금 날 부동산에 기존 집주인과 새로운 집주인, 그리고 임차인인 나까지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것이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의아했었는데 그게 다 갭투자 과정이었다니.
전세 대출받아서 대출 이자까지 내던 어린 날의 내가 가여워진다. 그게 결국 집주인에게 무이자로 돈을 빌려줬던 셈이니까.
씁쓸하지만 과거에 머물러 있을 시간이 없다.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 나는 집주인이 되기 위해 청주까지 온 것이다.
더 이상 거만 떨지 말고 본격적으로 궁금한 것들을 물어봐야겠다.
"잔금 날까지 전세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면요?"
"잔금 날까지는 무조건 잔금을 치러야 해요. 전세 세입자가 안 구해진다면 전세보증금을 낮춰서라도 구해야죠. 간혹 잔금일을 연장해 주는 매도인도 있기는 한데 드물어요. 매도인들도 다 사정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지.
매도인들도 다 사정이 있어서 매도하는 거겠지.
부동산 아줌마가 다시 말을 이어간다.
"그래서 투자를 할 때는 갭이 2~3천이라 하더라도 보수적으로 생각하고 예비 투자금이 있어야 해요. 보증금을 낮춰서라도 세입자를 구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지금처럼 투자자들이 한꺼번에 몰려올 경우 전세 매물도 늘어나기 때문에 세입자들은 더 좋은 조건의 집들을 골라서 가요."
"아.. 저는 3천밖에 없는데.."
"우리 단지는 솔직히 3천이면 충분해요. 그런데 지금 투자금을 줄이기 위해 무리해서 전세를 최고가에 맞출 필요는 없답니다. 세입자 보증금은 결국 돌려줘야 하는 돈이기 때문에 나중에 힘들어질 수도 있거든요"
강의 하나를 듣고 있는 기분이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이 모아지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그리고 부동산에서 얼마 있냐고 물어보면 최대한 딱 맞춰서 돈 없다고 이야기하세요. 그래야 부동산도 총각에게 더 알맞은 매물을 찾아요. 아까처럼 1억 들고 여기 왔다고 하면.."
"아따 호구 왔능가? 이거 맞죠?"
"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가 스승님으로 모시고 싶은 정도로 멋진 강의였어요. 집 가서 생각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두 손을 예쁘게 모으고 90도로 인사한다.
꾸벅.
.
.
.
돌아오는 차 안.
공기가 무겁다.
돈 없어 보이기 싫어서 거짓말을 했던 내 모습이 한없이 작아 보인다.
정말 초라하다.
아니 짠하다.
돈에 대한 열등감이 스스로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핸드폰 네비게이션 위로 문자 알람이 잠시 스쳐 지나간다. 운전 중이지만 메세지를 확인해 보기 위해 메세지함을 열어본다.
상복대 부동산
[ 총각, 좀 전에 본 402호 거래됐습니다. 조심히 내려가세요 ]
허탈한 마음으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오늘의 전국 부동산 분위기를 살펴보기 위해 오픈 카톡방을 열어본다.
고작 몇 시간 카톡 확인을 하지 않았을 뿐인데 카톡이 1000개가 넘게 쌓여있다. 그것도 오픈톡방 하나에서.
다 읽기는 귀찮으니 가장 최근에 했던 대화 내용만 살펴본다.
"오늘 청주 다녀왔는데 진짜 핫해요ㅋㅋㅋ"
"저도 오늘 청주 계약 완료~"
모두가 청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늘 집 보고 온 사람들도 많았으며 그중 대다수는 계약금까지 입금했다고 한다.
그때, 또 하나의 대화가 올라온다.
"저는 전화만 한 번 돌렸는데 어떤 신혼부부가 4층이라 고민하고 있다고 하길래 그냥 계약금 먼저 쐈습니다ㅋㅋㅋ 부동산은 고민하는 그 순간이 가장 싸요~"
와씨.
이거 내가 본 집 같은데 이 사람이 계약했구나. 부동산 아줌마 문자 내용이 맞았네.
이런 계묘년, 신축년, 경자년, 갑진년.
내가 아는 육십 갑자를 모두 사용해서 속으로 욕을 한 사발 해본다. 어차피 저 사람이 아니었더라도 계약은 하지 않았을 거면서.
그나저나 청주시가 정말 핫하긴 하구나.
사람들이 죄다 저평가라고 하네.
정말 매수해야 하나..
청주시 내 갭이 딱 붙어있는 다른 동네들도 찾아보기 시작한다.
대복동, 경가동, 남산동, 불평동, 오짬읍 등등..
그런데 알아보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갭만 생각하고 있다 보니 내가 놓치고 있던 정말 중요한 한 가지.
청주시는 투기과열지구다.
현재 나는 대전에 집 한 채를 가지고 있는 상황. 대전도 투기과열지구, 청주도 투기과열지구이기 때문에 내가 청주에 집을 취득하는 순간 취득세 중과대상이다.
취득세만 8%.
그럼 2억 5천 짜리 집을 사면 취득세만 2천만 원이라는 건데..
그럼 안되지.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