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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우 Feb 13. 2022

나의 첫 주례

'양' '군'은 사라졌습니다.

"너를 보니 네 아버지 생각난다. 잘 살아라"


"금산아 내가 무슨 말하려는지 알지?" 

"네" 

"그럼 그렇게 살어. 주례사 끝."


세상에서 가장 짧은 주례사로 알려진 내용이다. 첫 문장은 김구 선생님이 지인의 아들 결혼식에서  말씀하신 내용이다. 그 아래 글은 '조금산'이라는 후배 코미디언 결혼식에서 배삼룡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내가 50대 중반에 주례사를 할 줄은 몰랐다. 


자기와 남친에게 인생의 지표가 될 수 있는 말씀을 해 달라는 직원


어느 날, 팀원 한 명이 청첩장과 함께 손 편지를 슬그머니 내밀었다. 그 직원은 내게 '살아가면서 배우고 싶은 어른의 모습이셔서 저와 남친에게 인생의 지표가 될 수 있는 말씀'을 해달라고 했다. 혹시나 부담스러워할까 봐서 '정말 정말 고민하다고 부탁드린다.'라고 하면서 '미안해하지 않으시고 거절하셔도 되니 편하게' 답을 해달라고 덧붙였다.


난감하다, 는 말이 스쳐 지나갔다. '주례'라면, 덕망 있고 연륜이 찬 사람이 신랑과 신부에게 삶의 지혜를 전달해 주는 예식의 진행자가 아닌가?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가, 하는 것이 첫 번째 질문이었고, 뭘 이야기하지, 라는 것이 두 번째 난관이었다.


편지를 한번 더 읽는 순간, 그 직원은 내게 퇴로를 차단시켜 놓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거절하셔도 되니'라는 말 때문이다. 나는 사무실에서 직원에게 '함 해보자, 그거 좋겠네, 좋은 생각이야, 고생 많았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다. 나는 '아니오, 안 되겠는데, 하지 마'라는 말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직원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너의 부탁을 거절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해보자, 후회하지 말고.


이제 '양'과 '군'은 사라졌습니다.


글자크기 14포인트, 줄 간격 160%로 작성한 주례사는 A4용지 세 장이었다. 주례사는 하객에 대한 감사와 결혼 축하로 시작하였다. 이어서 '화성에서 온 여자, 금성에서 온 남자'라는 표현을 들어 남녀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라고 부탁했다. 최인철 교수의 <프레임>을 소개하면서 세상 일에는 좋은 면과 나쁜 면이 있다고 하면서 삶을 바라보는 태도를 긍정적으로 가지고 살아가길 바랐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끝날 때 했다. 나는 주례사를 하면서 처음부터 '00양, 00군'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두 사람 모두 '씨'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우리 사회에서 부여한 성 역할을 의식하지 말고, 바깥과 안을 구별하지 말고 사랑을 이어가기를 당부했다. 이제 바깥양반과 안사람은 사라졌다고 하면서 처가와 시댁을 구별하지 않고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했다.


<아주 작은 차이>와 <딸에 대하여>


성 평등을 이야기하는 책으로는 <아주 작은 차이>와 <딸에 대하여>가 기억에 남는다.  알리스 슈바르처는 70년대 중반, 독일에 사는 여성 13명을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아주 작은 차이>에 담았다. 등장하는 여성은 평범한 주부에서부터 이혼자, 동성애자, 성매매 직업여성이다. 저자는 '여자들은 사랑의 이름으로 착취당한다. 그런 까닭에 성은 개인적인 게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저자는 의존적 태도를 버리고 자기 스스로 존중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여자들끼리 모여 서로의 문제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함께 고민하면서 서로에게 힘을 보태고 이를 통해 자신감을 얻는 체험을 가지라고 한다.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라는 소설이 있다.


"너희가 가족이 될 수 있어? 어떻게 될 수 있어? 혼인신고를 할 수 있어? 자식을 낳을 수 있어?"

"엄마 같은 사람들이 못하게 막고 있다고는 생각 안 해?"


2층짜리 낡은 주택 하나에 의지하며 요양보호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엄마, 서른 살이 넘어 시간강사로 발품을 팔다가 강사법 개정을 이유로 동성애자들을 잘라버린 대학 앞에서 시위를 주도하는 딸, 엄마는 딸이 평범하게 살아주기를 바라고 딸은 자신의 삶을 인정해주기를 바랐다. 엄마와 딸, 딸의 애인, 이렇게 세  사람의 이야기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성소수자를 '엄마가 정의하는 가족'으로 인정해 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질문에 도달한다. 다음은 '작가의 말'에서 인용한 문장이다.


"소설을 쓰는 동안엔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해라는 말속엔 늘 실패로 끝나는 시도만 있다고 생각한 기억도 난다. 그럼에도 내가 아닌 누군가를 향해 가는, 포기하지 않는 어떤 마음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소설은 끈질기게 계속되는 그런 수많은 노력 중 하나가 아니었는지"



나는 나의 결혼식을 떠올려보았다. 북새통 속에 치르진 결혼식, 나도 잘 알지 못하는 주례 선생님의 웅얼웅얼 주례사, 나는 주례사를 기억하지 못한다. A4 세 장 분량의 주례사를 그 부부는 기억하고 있을까? 그냥 한 마디만 할 걸, "잘 살어, 주례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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