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질퍽한 흙바닥을 걷거나 승합차를 운전하는 일은 무언가에 홀리지 않으면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팀장과 나는 아직 기반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미음산업단지에 임시 천막을 마련했다. 도시공사의 도움을 받았다. 궂은 날씨와는 달리 대기업 임원진과 우리 팀은 서로 반갑게 인사를 했다. 대기업 상무님이 방문했다. 우리는 도면을 걸쳐놓고 입지 조건과 지자체에서 지원할 수 있는 혜택을 설명했다. 회의는 저녁시간까지 이어졌고 나는 기업 방문단을 부산역에 모셔드리고 하루 일정이 끝났다. 운전은 나의 몫이었다.
#장면 2
나는 지상에서 발을 떼어 더 가까이서 태양열을 받고 싶지 않았다. 한여름 도로는 한산했다. 생전 처음 타보는 고가사다리였다. 전주 윗부분에 친친 감긴 통신선의 길이와 연결상태를 확인했다. 나와 고성이 오고 간 업체의 팀장도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추가로 두 곳의 전주를 살펴보고 현장확인을 마무리했다.
'장면 1'은 대기업 유치 업무 이야기다. 서울에 본사를 둔 기업의 데이터센터를 유치하기 위해 부지 현장만 아홉 번을 다녀왔다. 협상 미팅은 서울과 부산을 합쳐 삼십 회 이상이었다. 대기업 데이터센터 부서와 우리 팀 간 서로 신뢰가 쌓이면서 결국 기업유치에 성공했다. 일 년간 장기 교육을 받기 위해 교육원에 입교하는 날, 착공식을 했다. 그날 드물게 부산에 눈이 왔다.
업무 때문에 잠을 못 이룬 경우는 많지만 '장면 2'의 업무를 맡았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 그해 여름 내내 나는 잠을 설쳤다. 사연은 이렇다. 시는 수출용 대형 변압기를 만드는 기업을 유치하였다.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알게 되었다, 항만까지 운송하는 도로가 대형 변압기의 무게와 높이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런저런 노력 끝에 예산을 확보하였다. 교량을 보강하고 도로를 막는 표지판과 신호등을 교체하기로 하였다. 전주와 통신선의 높이를 올리는 것도 필요했다.
공사를 막 시작하려고 할 때 다시 문제가 터졌다. 당초 수요조사에서 빠진 통신회사가 나타난 것이다. 이설 공사비만 14억이 필요하다고 견적서를 시에 보냈다.
나는 전기와 토목공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설계도와 공사견적서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했다. 통신선 공사업체를 불러 사정하고 윽박지르고 부탁했다. 회의 중에 분위기가 험악해지기도 했다. 통신선 구입비를 아끼기 위해 전주에 남아있는 여유분을 이용하자고 부탁하고, 접속 시험 횟수를 줄이자고 요청했다. 변압기가 지나는 모든 지점을 샅샅이 훑었다. 어떤 곳은 변압기가 지날 때 장대를 이용해 선을 들어 올리자고 협의했다. 마침내 운송로 높이 7.49미터를 확보했다. 수출길이 열렸다. 그해 겨울이었다.
직장에서 앞뒤 물불 안 가리고 일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금전적 보상과 승진이 유혹하기 때문에 열정을 가지게 되는 경우도 있다. 개인적인 성취욕 또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일 수도 있다. 나는 함께 일하는 사람과의 조화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개인 사업자의 열정과 직장에서의 열정이 확연히 차이 나는 이유는 '사람'때문이다. 직장에서는 자기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동료가 또는 상사가 도와주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나의 경우, 기업을 유치하고 기업애로를 애결하는 과정에서 주위 사람들이 전적으로 신뢰하고 응원해 주었다. 대기업 유치의 경우, 나는 팀장과 호흡을 맞춰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기관을 방문했다. 팀장과 나는 눈빛만 봐도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사이가 되었다. 변압기 수송로 확보 문제는 달랐다. 고민은 나 혼자 했고 현장에도 팀장 없이 혼자 다녔다. 팀장과 과장은 간섭하지 않았다. 그들은 응원하고 지원했다. 상사가 내가 하는 일에 시시비비를 따지거나 보고하라고 지시하였으면, 나는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모든 에너지를 수송로 확보에 바쳤다.
내가 직장에서 열정을 가지고 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을 잘 만났기 때문이었다. 혹시 지금 직장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열정이 없다면 먼저 동료 간 신뢰를 쌓아보자. 그다음부터 일은 절로 풀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