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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우 Aug 25. 2023

네가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체력을 먼저 길러라

퇴직자에게 진짜 필요한 건 따로 있다

네가 종종 후반에 무너지는 이유, 대미지를 입은 후에 회복이 더딘 이유, 

실수한 후 복구가 더딘 이유, 다 체력의 한계 때문이야.


체력이 약하면 빨리 편안함을 찾게 되고, 그러면 인내심이 떨어지고,

그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게 되면 승부 따윈 상관없는 지경에 이르지.


이기고 싶다면 네 고민을 충분히 견뎌 줄 몸을 먼저 만들어.

정신력은 체력의 보호 없이는 구호밖에 안돼!


많은 직장인이 인생 드라마로 꼽는 <미생>(2014)에 등장하는 대사다. 이 장면은 장그래가 새벽에 산을 뛰어오르면서 시작한다. 거친 호흡으로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바둑을 가르쳐 준 할아버지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네가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체력을 먼저 길러라. 네가 종종 후반에 무너지는 이유......'


주인공 장그래(임시완 역)는 어릴 때부터 바둑에 매달려왔으나 프로입단에 실패했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대기업의 인턴사원으로 취직했다. 조직 생활을 해 보지 않은 장그래에게 회사는 정글이었다. 하루치의 에너지를 직장에 쏟아놓고 퇴근하면 장그래는 파김치가 되었다.


다음날, 장그래는 새벽을 깨우고 출근했다. 동료와 상사, 거래처 사람과 부대꼈다. 장그래가 실적을 내고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체력이었다.  웃음을 잃지 않고 끈기 있게 사람을 설득하고 묘수를 생각해 낸 것은 매일매일 쌓아둔 근육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퇴직 후 내 삶의 속도는 얼마나 떨어질까? 


어느 날 아침, 문을 나섰지만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해 보자. 축 처진 어깨에 걸쳐진 백팩, 차려입었다고는 하지만 어딘가 좀 커 보이는 양복 윗도리, 살이 빠진 엉덩이와 허벅지를 감추기에는 헐렁한 바짓가랑이. 내 걸음은 영화 속 슬로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느릿느릿할 것이다.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듯하다. 


나는 내가 이루고 싶은 게 있다. 퇴직 후에도 내 삶의 속도를 유지하고 싶다. 나는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지금 준비하고 있다. '할 수 있는 일'이란 내가 쌓아 둔 관계 속에서 내가 가진 역량을 사용할 수 있도록 누군가가 내게 일자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이란 독서와 글쓰기다. 


나는 지금 글도 쓰고 북튜버도 하고 있다. 시도와 도전은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지만, 어설프고 성과도 없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계속하다 보면 구독자와 팔로워도 늘 것이다. 그렇게 되면 퇴직 후에도 내 삶의 속도가 급하게 추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50대 후반에 헬스를 시작했다.


후반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체력을 길러야 한다.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아도 끈기 있게 밀어붙이려면 체력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퇴직 준비를 하고 있는 내게는 절실하게 와닿는 말이다. 


유튜브 알고리즘에 의해 우연히 보게 된 드라마 <미생>의 대사가 며칠 동안 나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퇴직을 생각하면서 나의 고민, 즉 퇴직 후 내 삶의 모습에 대한 걱정은 깊어졌다. 나의 고민을 들어주는 것은 명석한 두뇌가 아니라 나의 근육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직장 주변의 헬스장을 검색했다. 나는 등록하기로 먼저 마음먹고 상담을 받았다. 초보자에게는 근육을 올바르게 작동시킬 방법과 기구의 사용을 가르쳐줄 선생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대일로 트레이닝을 해주는 프로그램으로 계약했다. 비용이 만만치 않았지만 나의 근육을 강화시켜서 본전을 뽑기로 했다. 


수영을 배워 본 사람은 안다, 시작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십여 년 전 수영을 처음 배우는 시기에는 거의 매일 수영장에 다녔다.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를 때까지 죽기 살기로 했다. 지금은 어느 수영장에 가든지 빠지지는 않는다. 헬스장 근처에 가본 적이 없는 나는 수영을 처음 배울 때를 떠올렸다. 

 

헬스장에 다닌지 아직 한 달이 지나지 않았지만 만족한다. 하루아침에 근육이 불끈 솟아오르지 않았다. 나의 장기를 발휘해 보기로 했다. 나의 장기는 끈기다. 하나씩 쌓아 올라가는 것이다. 어제 아침 헬스로 근섬유 하나가 완성되었다. 물론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벌어진 가슴과 살짝 튀어나온 어깨 근육에 얹힌 백팩, 반듯하게 세운 척추에 적당한 볼륨을 가진 엉덩이와 허벅지가 받쳐주는 상체, 비싸지 않은 양복이라도 태가 날 것이다. 분명히 발걸음은 느려졌지만 오히려 여유와 품위를 느끼게 하는 속도. 나는 새로운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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