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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우 Nov 20. 2023

멜로에서 블록버스터로_퇴직자 집단 인터뷰


 토요일 오전 10시 10분 전, 연산동 지하철역 부근 어느 카페 2층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우리 일행은 예약해 둔 2개의 회의실을 옮겨 다니며 좌석을 정리하고 명패를 놓았다. 회의실로 입장하는 인터뷰 대상자들에게 음료를 직접 주문받았다. 퇴직자 5명, 퇴직 예정자 5명이 오기로 했는데 퇴직자 한 분은 일이 생겨 오지 못했다. 10시가 되자 퇴직자 그룹과 퇴직자 예정자 그룹은 별도의 회의실에서 인터뷰를 시작하였다.   

  

퇴직에 관심을 두는 이유 

    

내가 사회를 맡은 퇴직자 그룹에는 인터뷰 대상자 4명, 진행자와 보조자, 기록 담당, 모두 7명이 자리를 잡았다. 나는 그룹 인터뷰의 취지를 설명하였다. 60년대생 860만 명이 직장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 이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 개인적으로 퇴직자가 제2의 삶을 얼마나 잘 준비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해서 연구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올해 연초부터 나는 퇴직을 주제로 관련자를 모아놓고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나는 계획만 세워두고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었다. 내가 퇴직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나 자신이 퇴직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퇴직 준비를 하고 그 결과를 직장 후배들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도 이유 중 하나다. 마지막으로는 이런 연구를 통해 시에 정책을 제시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 같았다. 

    

8월에 학습조직을 지원하는 담당 부서에서 정책연구모임에 도움을 주겠다는 계획을 전 부서에 알렸다. 이번에는 타 부서 직원도 연합해서 팀을 만들 수 있다고 해서 퇴직과 관련된 부서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를 포함해서 9명의 직원이 모였다.

       

9월 둘째 주에 전문가를 모시고 이론적인 공부를 하고 넷째 주에 FGI(포커스 그룹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다. 인터뷰 대상자는 내가 평소에 알고 있는 사람으로 초청하였다. 타인과의 소통에 어려움이 없고 주제에 대해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터뷰를 부탁드렸다. 사례비는 없었다. 회원들이 커피와 돼지국밥을 대접했다. 토론 내내 진지함과 웃음이 오갔다. 참석자들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다 꺼내놓았다.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성인 자녀에게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은 퇴직자

      

나는 어느 정도 틀이 갖추어진 질문지를 만들어서 대상자에게 미리 보냈다. 질문지 내용은 간단하다. 각자에게 퇴직의 의미와 퇴직 전후를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차이를 물어보았다. 이어서 퇴직자의 ‘건강, 재정, 관계, 여가’ 부분에서 문제점을 들어보기로 했다. 마지막으로는 지방 정부에서 해 줬으면 좋을 시책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했다. 

    

퇴직의 의미를 묻는 말에서부터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노는 것을 익혀가는 것이다, 하루하루를 잘 살아가는 것이다, 직업을 바꿀 기회다, 등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기업에서 퇴직한 A 씨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자기 경험을 살려 인생 가치를 재정립하고 남은 시간과 마음, 돈을 소중한 것을 위해 사용하는 것“     


퇴직 전과 후,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B 씨는 판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마치 멜로에서 블록버스터로 장르가 바뀌듯이 큰 변화가 왔다는 것이다. B 씨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범생이로 살았던 것이 제일 후회되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는 부당한 지시와 가짜 관계 속에서 힘든 직장생활을 했었다. 퇴직한 다음 날 머리가 아주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참석자들은 재정 문제에 대해서 많은 의견을 냈다. C 씨는 배우자가 갑자기 재산을 나누려고 해서 당황했다고 한다. 가정에 근로소득이 없어지면 퇴직 가족자들은 심리적 불안감이 커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일 많이 나온 이야기는 성인 자녀에 대한 지원 문제다. 재산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자녀의 대학원 진학, 결혼 준비자금, 주택 마련 자금에 대해 부모로서 부담이 간다고 이야기했다. 금전적으로 도움을 줘야 할지 퇴직자들은 고민하고 있었다. 

    

소소하지만 경조사비도 부담이 된다고 하였다. 소득이 있을 때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퇴직 후에는 이런 지출도 부담이 되는 것이다. 퇴직 후 동호회 활동을 넓혀 가던 B 씨는 경조사비 문제로 배우자로부터 잔소리를 듣는다고 하였다. 

    

지방 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느냐고 물었다. 퇴직자들이 모일 수 있는 기회와 장소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왕이면 차비도 좀 주면 좋겠다고 했다. 더 나아가 전문가 DB를 구축해서 플랫폼을 만들어보겠다는 퇴직자도 있었다. 한 사람이 하는 일을 두 사람, 세 사람이 나누어서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1년에 2만 원 주고 아파트 부근 밭에서 농사를 짓는 퇴직자는 주말농장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는 올해 오이 300개를 따서 이웃과 나눠 먹었다고 한다. 

    

인터뷰를 하면서 내게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퇴직 후 재취업을 한 D 씨는 퇴직자의 축적된 경험, 노하우, 통찰력을 가져오고 싶은데 직위가 없으니 모셔 올 수 없다고 하였다. 퇴직자 모임 조직을 만들어 직함을 주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퇴직 전 가진 기술이나 경험을 기반으로 시니어 창업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퇴직자들의 인터뷰는 예정된 한 시간을 넘겼다. 퇴직 예정자 5명이 인터뷰를 마치고 우리 회의실에 합류했다. 퇴직 예정자들은 같은 질문에 대하여 어떤 답을 했는지 궁금했다. 더불어 퇴직자와 퇴직 예정자들이 만나면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갈지에 대해서도 구미가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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