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케치와 함께하는 문학여행'의 레퍼런스(참고 도서들에서 기록한 문구들)를 정리하다, 프루스트의 글귀 몇 구를 적어본다.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4권에서 발취하였다.
프랑스 문학 여행지를 체크하다 보면, 프루스트가 자주 떠오른다.(예전의 여행기에도 여러 번 그의 책에서 흥미로운 문구들을 가져왔다.) 그만큼, 그는 작품에서 당시 프랑스의 생활사를 세밀하게 관찰하여 보였고, 해외 여행기도 흥미롭다.
하지만,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프루스트가 칩거 생활을 하며 나온 작품이다.
사랑을 영원히 잃고, 제목 그대로 그 시절을 회상하며 쓴 작품.
서른 후반부터, 51세로 파리 중심가에서 죽기 직전까지 칩거하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엿보게 해주는 구절을 옮긴다.
(여행기에 적기에는 애매하여 이곳에 따로 적는다.)
사랑에 대하여...
우리가 매일 쓰는 시간은 탄력적이다.
우리가 느끼는 정열은 시간을 확대하지만,
남에게 불어넣은 정열은 시간을 줄어들게 하여 습관이 나머지 시간을 채운다.
습관의 한 측면인 체념은 어떤 종류의 힘을 무한히 증가시킨다.
등등 여러 글귀가 이어지고.. 이어진다. (본격적인 사랑 얘기인 5권부터는 더 많은 사랑 글귀가 있을 듯 하지만, 아직 읽을 엄두가 안 난다... 이유는, 예전 글을... https://brunch.co.kr/@atelierjryu/6 )
예술가인 그가 (정확히는, '읽어버린...'을 쓰기 전에는 프루스트는 해외여행과 문화생활을 즐기던 부유한 무직, 한량이었다) 왜 사랑을 택하고, 우정을 버렸는지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내가 이 소녀들의 정원에서 온종일 즐겁게 시간을 보내느라, 사교적인 즐거움뿐 아니라 우정의 즐거움마저 희생한 게 어쩌면 잘못된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존재들에겐 -사실 예술가들이 그러한데-
그들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할 의무도 있다.
그런데 우정은 그들에게 이러한 의무를 면제하며 자아를 포기하게 한다.
우정의 표현인 대화조차도 피상적인 횡설수설일 뿐 우리에게는 아무 득도되지 않는다.
한 평생 말을 한다 해도 우리가 반복하는 것은 한순간의 공허일 따름일 반면 예술 창조의 고독한 작업에서 사유의 진행은 깊이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사실 큰 고통이 따르기는 하지만,
이것만이 진실의 목적을 위해 우리가 발전할 수 있는, 또 우리에게 닫혀있지 않은
유일한 방향인 것이다.
우정은 대화처럼 미덕이 부재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해를 끼치기까지 한다.
사랑은, 프루스트가 일생의 작품을 창조할 원천이 되지만, 우정은 반대로 피해야 할 존재였다. (그에 대한 자세한 이유 역시 5권부터 설명될 듯하다)
물론, 프루스트뿐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예술가는 우정의 필요성을 그리 느끼지 못한 듯 보인다.
작품에 전념할 때는 시간도 마음도 타인에게 줄 여유가 별로 없는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해 보인다.
(유명 화가들의 스케줄을 보면, 밥 먹는 시간 외에는 작업에 매진한다. 소설가들은 글쓰기에 집중 가능한 시간이 화가보다 짧기에, 나머지 시간은 술집에서 사교 생활을 하며 보내는 경우도 꽤 보인다.)
반대로 생각하면- 프루스트의 연인이 살아있어 그와 함께 했고, 계속 활발한 살롱 활동과 해외여행으로 바쁘게 살았다면,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탄생하지 못했을 거 아닌가. 작가의 고통과 고독이 원료가 되어 만들어진 작품이라니...
문득, 이런 보석을 만들어 준 작가에게 감사하며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든다. (다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덧붙여..
/후기..
/커버 이미지는, 예전에 외국의 카페에서 아이패드 초보시절 끄적인 나무 스케치
/ 여행 에세이, 앙티베 편은, 피츠제럴드의 'Tender is the night'를 재독 후 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