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의 ‘독서에 관하여’를 읽고
독서는 정신적인 삶의 도입부에 있다. 독서는 그러한 삶에 안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하루키의 소설 ‘1Q84’, 이와이 슌지의 영화 ‘러브레터’ 등 타 작품들에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간접적으로 접한 일은 종종 있었다. 그러다 뒤늦게 프랑스 문학 여행을 목표로 하고서야 그의 작품을 읽었다.
악명.
프루스트의 작품은 읽기 어렵기로 유명하기에 선뜻 다가가기 쉽지 않았다. 문학소녀 사강 또한, 중간의 클라이맥스에서 시작했기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하지 않았던가… 우선은 가볍게 그가 쓴 독서에 관한 에세이를 골랐다.
첫 감상.
짧은 에세이지만 힘들었다. 길고 긴 문장들, 그리고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문체는 내 의식도 쉽사리 다른 곳으로 떠나보내곤 했다. 딴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그 문장을 읽기를 반복하는, 그런 덫에 걸리기 십상이었다. 즉, 그의 글은 정신 작용의 촉매라는 점에서는 좋을 수 있으나, 가독성은 최악이었다. 그러나 힘겹게 이해한 문장들은 심장을 울리며, 고개를 저절로 끄덕이게 하였다.
게으름이나 변덕스러움은 정신의 진정한 삶이 시작되는 자기 내부의 깊은 곳에 자발적으로 내려가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는 아는 것만을 이해할 수 있다. 오웰의 소설 ‘1984’에서 나오듯, 우리는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을 타인의 소설에서 확인할 뿐이다. 그 점에서 프루스트는 최고의 작가였다. 그의 글은 어렴풋이 느끼는 막연한 감정을 언어의 마법으로 또렷이 보여준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기 시작하며, 매일 힘겨운 나날이 시작되었다. 프루스트의 문체에 익숙해졌다 싶으면 다시 막히길 반복, 생전 처음 소설을 읽기 위해 애쓰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다. 철학 책도 아닌 소설이 이렇게 읽기 힘들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평소에 막연하게 느낀 감정을 이렇게 자세히 표현해주는 소설은 드물었다. 그제야 나는 나 자신의, 그리고 타인의 생각을 조금 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게으른 영혼은 스스로 창조적인 행위를 추진할 수 없기 때문에 순전히 고독함에서는 아무것도 받아 낼 수 없다.
독서의 습관은 완전한 고독을 즐기는 자세를 만들기에, 철학과 예술활동으로 이어지는 다리이기도 하다. 홀로 익힌 독서의 즐거움은, 창조적인 예술 활동, 즉 고독 안에서 인내를 가지고 무언가를 꽃피우는 과정 또한 익숙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것이 그렇듯, 독서에서도 균형이 중요하다. 너무 빠져든다면, 안 읽는 만 못할 수도 있다. 자신만의 정신을 가지려면, 직접적인 삶의 경험과 창조 활동의 조화가 필요하다. 독서는 길잡이 일뿐,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프루스트도 그에 대해 경고했다.
반대로 독서가 정신의 개인적인 삶에 눈을 뜨게 하는 대신에 그것을 대체하려 할 때 위험해진다.
(참고: 인용된 부분은 모두 프루스트의 '독서에 관하여'(민음사)에서 옮겨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