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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 Jerk Nov 23. 2015

[달려라 아비] 밑줄 읽기

김애란 단편소설집

김애란은 놀라운 작가다. 책에 뜸하고 흥을 잃은지 몇 해가 된 나를 다시 책 앞으로 불러 앉힌 이야기꾼이자, 삶의 통찰과 놀라운 표현, 유머감각으로 지성까지 사로잡는 타고난 작가다. 보석 깎듯이 정성을 들여 수년간 만진 담론의 형태가 아니라, 커피 한 잔 놓고 수다 떠는 자리에서 쏟아지는 이야기처럼 자연스럽다는 점에서 더 큰 경외를 자아낸다. 혜성과 같이 나타나 문단으로부터 '차세대 한국문학의 희망'으로 한결같은 찬사를 받고 있는 이 작가는 어리지만 정말 잘 여물었다. 내가 차기작을 가장 기다리는 작가인 동시에, 감히 짐작건대 국내 시장에서나 국제적으로도 더 큰 명성과 환영을 받을 작가라 생각한다.


<달려라 아비>

사포처럼 반짝이는 햇빛이 빳빳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홀로 나를 낳으며)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어머니는 가위로 방바닥을 내리찍었다. 그렇게 몇시간이 지난 뒤, 어머니는 가위로 자기 숨을 끊는 대신 내 탯줄을 잘라주었다.

:자신의 죽음이 자녀의 생명으로 지어지는 순간. 그 "연결"의 드라마틱함을 단절의 도구인 가위를 이용해 전달.


나는 어머니가 좋았지만 그것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몰라 자꾸만 인상을 썼다. 나는 내가 얼굴을 구길수록 어머니가 자주 웃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사랑이란 어쩌면 함께 웃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우스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만일 어머니가 아버지를 오늘까지만 기다리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아버지는 항상 그 다음날 오는 사람이었다.

:늘 기회를 잃는, 조금은 미련한 존재. 눈치가 없는 사람, 결국엔 버려지는 사람.


나중에는 정말 미안해진 나머지, 못난 사람보다는 나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고 싶었을 만큼 착한 사람이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잘못하고도 다른 사람이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하는 진짜 나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 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나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였다.


(천방지축으로 사고를 치고 다니는 이유)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새끼가 속도 깊고 예의까지 발라버리면 어머니가 더 쓸쓸해질 것만 같아서였다.


어머니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 부분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손으로 곱게 매만졌다. 그때 나는 농담 잘하고 씩씩한 내 어머니가, 한번도 울어본 적 없으나 성대가 부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

편의점은 묻지 않는다. 참으로 거대한 관대다.


무책임한 것보다 잠시 민망한 게 낫다 싶어 죽도록 심심해 보이는 주인여자 앞에 내가 화투패를 열듯 과감히 콘돔을 내보였을 때, 그녀는 정말 심심했던 까닭인지 수상한 눈초리로 내게 물었다.


주인여자가 속으로 나를 '콘돔샀던여자콘돔샀던여자'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느낌도 그곳에 발을 끊는데 일조했다.


그 나이에도 의심이 적고, 성격이 부드러운 사람들이란 대개 그들을 부드럽게 만들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살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기를, 배반을, 착취를, 불평등을 모른다. 그들은 아마 그들이 노력한 만큼 벌거나 노력한 것 이상으로 벌어온 사람들일 것이다. 모든 부드러움에는 자신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잔인함이 있다. (중략) 나는 정직하므로 가난하고 그들은 부정직했으므로 풍족하다. 가치란 편의점의 물건과 같아서 그런 식으로도 교환될 수 있는 것이다.



<스카이 콩콩>

나는 (가로등)그가 꺼졌다 켜지는 순간이, 세계가 재빨리 눈을 감았다 뜨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지구의 원주와 가로등이 손끝으로 그려내는 원의 너비. 그리고 그 두 원의 너비 차가 만드는 사이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

:지표면에서 가로등까지, 인류가 생활하는 반경을 이렇게 놀랍도록 묘사한다


(고추를 보여준 뒤 스카이 콩콩을 얻고 나서) 스프링의 탄력과 함께 나의 수치심은 우주 멀리 날아가버렸다.


"안되겠다, 테레비를 없애야겠다." 순간 나는 형의 따귀를 때리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얼굴을 봐서 참았다. (중략) 그것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라기보다 가장으로서 뭔가 결정해야 하는 순간, 뭘 해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뭔가 하기는 해야 할 때 내리는 엉뚱한 결론 같은 거였다.

: 여기서도 아버지는 병신 같은 존재. 위악을 드러내지만 속은 무르고 순하다.


형은 스스로 두 눈을 찌른 사람처럼 자신의 안구를 부여잡고 미친 듯이 울었다.


나는 복수심에 불타 아버지를 위해 절대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위대한 사람은 더더욱 되지 않을 테다. 중학생이 되면 여자랑 잘 거다. 치졸하고 비굴한 사람이 될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늙었을 때, 텔레비전이라고는 한대도 없는 요양소에 보내 죽도록 심심하게 내버려두는 인간이 될 테다.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 기분을 뭐라 표현해야 될지 몰라, 스카이 콩콩을 탔다.


형은 더이상 안경을 벗어던지며 "아버지, 앞이 보여요!"라고 외치던 병신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커다란 손바닥을 바라봤다. 칼 한자루만 쥐여주고 추방해도 좋을 만큼 믿음직한 손이었다.


전신마비 환자가 눈꺼풀로 쳐주는 박수처럼 가로등은 형에게 윙크했다. 그때 나는 가로등이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눈감아주기 위해 저기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빙글빙글 돌며 수직으로 내려오는 비행기 떼는 마치 하늘에서 쏟아지는 꽃비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뜻밖에도 꽤 아름다웠다. 형은 멍하니 서서 그 꽃비를 맞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형에게 어떤 재능이란 게 정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정신없이 가슴이 콩닥거렸지만, 그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도, 어떻게 말해야 될지도 모르겠어서,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뒤 홀로......스카이 콩콩을 탔다.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

(생각들이) 개천 위의 쓰레기처럼 그녀를 지나간다. 그녀가 잠 못 드는 데는 수만 가지 이유가 있다.


그녀는 옛날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위험하고 더러운 곳에서도 잘 잤는데, 자기는 왜 그때보다 더 안전한 곳에 있는데도 잠 못 들어하는지 궁금해한다.


우연히 본 벌레가 다시 나와 자신의 몸 위를 기어다니면 어쩌나 싶은 생각에 밤을 새고,


그녀는 그런 식으로 자신이 타인에게 요약되는 방식이 싫다. 같은 말이라도 '귓불'이 예뻣던 여자로 남고 싶지 '귀부랄'이 예뻣던 여자로는 편집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숫자도, 팬티도, 귀부랄도, 칠조석가여래좌상도 우주선에서 버려지는 쓰레기들처럼 저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이불에 감춰진 아버지의 하반신이 저 밑 콘크리트 속으로 한없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


그녀는 그녀를 잠 못 들게 하는 것이 아버지가 보는 텔레비전인지 텔레비전을 보는 아버지인지 알 수 없었다.


그후로 그녀는 다른 아르바이트 면접장에서 '저 질문의 의도는 뭐지?'만 요리조리 생각하다 면접을 망치고 나온 경험이 있다. 번역, 그것은 그녀가 세상을 불신하기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배운 옹알이와도 같은 것이었다.



<영원한 화자>

당신보다 당신의 절망을 경청하고 있는 나의 예의바름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례한 사람이다.


지하철 안은 한적했다. 나는 자꾸만 박살나고 있는 햇빛 바깥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스커트 아래로 완강하게 모아진 당신의 무릎, 졸음 아래로 툭 불거져나온 당신의 지퍼, 처음 샀을 때 아마 굉장히 좋아했을 것 같은 당신의 나이키, 오소소 솜털 돋은 귓불 아래로 부러 얕은 숨을 내쉬는 당신의 애인,(중략)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람을 죽이는 이유도 결국 그런 작은 것들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잠시 후 짧은 정차와 함께 당신과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거짓말을 할 때 코를 만졌던 옛날 사람처럼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어딘지 모르게 유치원 선생님처럼 사람을 부담스럽게 만드는 선량함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언제 어떤 표정을 짓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릴지 알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녀에게는 먼저 말을 걸어오는 동창들의 공통점 중 하나인 이상한 자신감이 흐르고 있었다.


오후의 지하철은 여전히 나른했고, 햇빛은 여전히 빠른 속도로 박살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아직도 나를 중학교 때 모습으로 대하는 그녀의 순진한 친절함이 이상하게 미안하고 그 미안함이 또 범박하게 느껴졌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녀는 한상 누군가에게 자신의 작은 비밀을 털어놓으며 상대방의 더 큰 비밀을 알아내는 친구였다.


(도시락을 혼자 먹는 일) 그것의 고통은 내가 혼자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혼자인 것을 모두가 '보고' 있다는 데 있다.


"더이상 욕망이 없는 사람이 지는 거다?"

:욕망은 삶의 의욕과도 같다. 욕망이 없는 사람은 모든 산 사람에게 진다.


나는 긴 주소지, 나는 제목만 따라 부르는 팝송, 나는 사진처럼 언제나 조금씩 잘린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하여, 우리는 흐르는 물에 손을 베이지 않고도 칼을 씻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 위험한 것을 늘 아슬아슬 가까이 두고 살아가는 존재. 조심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안전한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날로 위험한 세계에서 나날이 노련해져 간다.



<사랑의 인사>

단지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인류에게 여전히 매혹적인 존재, 공룡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도 네스호의 괴물은) 영국 어느 호수 밑에서 찬찬히 눈꺼풀을 끔뻑이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공존을 체감시키는 방식


(백두산에 나타난 '네시'뉴스) 그러니까 그는......나를 만나러 온 것이다. 자신의 모습이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방송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내게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별 목적은 없다. 다만 한번의 인사, 사랑의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곰이라고 밝혀졌다) 그 미련 곰탱이는 왜 하필 천지에 가서 수영을 하고 지랄이란 말인가.


하지만 사라지는 것들은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그리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것들은 반드시 할말이 있는 것이다.


(공원에 나를 두고 도망간 아버지를 깨달았을 때)그것은 단순하고 모호한 문장, 먼 곳에서 수백년 전 출발해 이제 막 내 고막에 도착하는 휘파람 소리, '아빠가 사라졌다'는 말이었다.


세상의 어떤 곰도 내게 다가와 한번이라도 아버지인 척해주지 않았고, 나는 거짓말을 잘하는 것은 공산당이 아니라 공공연한 사실들, 자기가 정말 사실인 줄 아는 사실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카운터를 보는 아저씨는 냉장고 옆에서 물개처럼 자고 있었다.


화면 속 심해동물은 무심하고 부드럽게 나풀거리며 어디론가 계속 헤엄쳐갔다. 그때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그것이 정말 무엇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설사 그것이 물고기들이 싫어하는 행동이라 하더라도, 싫어하는 반응이라도 해줬으면 하는 것이다. 나는 물고기의 무심함이 인간을 불안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포식자의 눈은 사냥을 돕기 위해 주로 정면을 향해 있고, 피식자의 눈은 포식자의 위치를 잘 감지해 도망칠 수 있도록 옆에 붙어 있었다.


어쨌든 많은 관람객이 물고기와 소통하고 싶어했고, 그 소통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몰라 대부분 주먹을 사용했다.


그녀들은 언제나 "당신의 상상력이 귀엽다"고 다가와서는 "이젠 좀 현실을 생각하라"며 버럭 화를 내고 떠났다.


나는 물속으로 천천히 대가리를 들이밀며, 부력의 주먹 사이를 매끄럽게 빠져나갔다. 내 동선을 따라 반짝이는 물방울들이 민들레 씨앗처럼 퍼져나갔다.


수조 안의 물고기들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아빠, 아빠, 아빠, 아빠' 하고 있었다.


문득,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 목적을 잃어버린 일상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아버지, 나는 어떻게 태어났나요?"

"움직이지 마라."

차가운 가윗날이 귀 끝을 스쳤다.

"그런 건."

아버지가 말했다.

"엄마에게나 물어보는 거다."

(...)

"하지만, 엄마는......죽었잖아요."


아버지 친구들은 그녀들을 인식한다. 그녀들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사내들보단 마음을 더 잘 숨긴다.


여름.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와 별빛, 그리고 두드러기 때문에 같이 놀게 된 무리가 있다. 모두 맨발이고. 모래를 밟을 때마다 전해오는 저릿함에 괜한 요의를 느낀다.


이렇게 두근거리는 순간일수록 모두에게는 어떤 시치미를 뗄 만한 장난이 필요하다는 것을.


파도에 실려온 아담처럼, 아버지는 똑바로 누워 있다.

: 세상을 모르는 순수한 최초의 남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손. 아버지의 젊은 손. 나는 아버지의 손에서 그리움을 본다. 아직도 아버지의 발끝에는 아버지를 향해 달려왔던 파도소리가 파랗게 배어 있는데 그녀는, 오지 않을 모양이다.


"언젠가 네가......."

나는 '언젠가'라는 말을 들으며 아버지의 따뜻한 해석을 기다렸다. 이럴 때 좋은 아버지들이란 대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주기 때문이었다.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사는 형을 만나게 되면, 그애에게 물어보아라."


그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본다. 아버지가 주춤한다. 배고픈 듯 활짝 벌어진 동공. 아버지가 어머니를 바라본다. 어머니도 아버지를 바라본다.



<종이물고기>

그는 가끔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공간을 상상한다. 그곳은 실패한 농담들의 쓰레기장, 감기 걸린 영웅들의 사물함, 진심을 위한 뱃지가게, 그리고 이름을 가져본 적 없는 어떤 곳들이다.


그는 먹이를 알아보는 짐승처럼 글자들을 알아봤다. 죽은 척하는 짐승을 발로 툭툭 차듯 그는 글자들을 더듬었다.


그가 읽는 신문은 대부분 구멍투성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면에선 다행이었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속지 않을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거짓과 진실은 출발한다. / 언론에 대한 작가의 불신


그는 자주 악몽을 꾸고 깨어나 울음을 터뜨리며 한참 살을 섞던 중인 부모를 놀라게 했다.


그런데 그들 가족은 뭔가 이상하다, 아닌 것 같다 싶으면서도 스테이크를 한번도 먹어본 적 없었으므로 항의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것을 스테이크라 믿고 먹었다.


"넌 뭐가 그렇게 괜찮냐?"

: 안 괜찮은 자신에 대한 화


(방을 구하는)그는 출산중인 소 우리에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는 농부처럼 고요함을 필요로 했다.


규칙도 순서도 없는 문장들이었지만, 그것들은 스스로 어떤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는 전혀 다른 시대, 다른 분야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놀라워했다.


버스 뒷자리에서 중학생들이 나누는 수다나 시장 아주머니들의 음담패설, 공원 할아버지들의 참견도 빠뜨리지 않고 적었다. 그는 말들이 가진 건강함에 놀라며 단상으로 채워진 세번째 벽면을 떼어내고픈 충동을 느꼈다.


바람이 들고 날 때마다 모든 벽면은 바깥을 향해 천천히 부풀어오르다 다시 원상태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럴 때면 다섯 개의 벽면에 붙은 포스트잇들은 일제히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자 그것은 더욱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 방 전체가 하나의 종이비늘이 달린 물고기가 되어 부드럽게 세상을 헤엄쳐다니는 상상을 했다.


그는 벽돌 틈에 삐죽비죽 나와 있는 포스트잇들이 짐승의 창자처럼 끔찍했고 또 수치스러웠다. 그는 포스트잇들이 그동안 벽면에서 서서히 진행되던 균열을 모두 가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소설가의 숙명. 이자 치명적인 약점. 이야기의 순수에 치여 세상물정을 모르고 산다. 소통을 잊기도 한다.


그는 손가락을 떼지 않은 채 포스트잇이 바람에 파르르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의 아가미처럼 가쁘게, 그러나 팔딱팔딱 뛰고 있었다.

:고집이 남아있을 때, 그의 세계는 생명력을 갖는다.



<노크하지 않는 방>

약속이라도 한 듯 다섯명의 여자는 문 닫는 소리에 따라 움직이며, 가끔 타이밍을 놓쳤을 땐 서로의 얼굴을 보고 이상하리만치 화들짝 놀라 얼른 문을 닫아버린다. 그럴 때 보는 서로의 얼굴이란, 반쪽 혹은 삼분의 일쯤으로 조각난 것이다.


신발 주인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도난사건이 이 집을 물기있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집에서도 생기는 일이 이 집에서도 생겨줘야 우리는 서로를 덜 무서워하게 될 것이다.


나는 복도에서 들리는 말소리와 기척만으로 그들의 들고 남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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