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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 Jerk Oct 05. 2016

페미니즘이 힘을 잃기까지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 이 글은 책을 홍보/권유하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내용에 대한 스포일링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혹시 읽을 예정인 분들은 이점 유념하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마리암은 날카로운 삽날이 직각을 이루게 세웠다. 그녀는 그렇게 하면서 '자신'이 처음으로 자신의 삶의 행로를 결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과 함께, 마리암은 삽을 내리쳤다. 이번에는 그녀가 갖고 있는 모든 걸 거기에 쏟아 부었다.
-본문 중


90년대 아프가니스탄, 두 여자.

혼외자식으로 태어나 신부로 '팔려온' 마리암은, 폭행을 일삼는 남편이 어린 라일라를 둘째 부인으로 들인 것에 분노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도무지 없다. 두 여자 사이의 긴장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연민을 통해 점차 해소된다. 어느 날 둘째 부인 라일라가 옛 연인을 만났다는 사실에 남편이 분노하며 죽이려 하자, 마리암은 삽을 집어 들고 흐려쳐 떼어낸다. 그리고 그 오랜 불행을 끊어내기 위해 모든 힘을 실어 남편의 머리에 내리꽂는다.


꽤 오래 걸린 책이다.

작중 세계가 낯선 중동을 무대로 하고 있어서이기도 했고, 두 주인공의 삶이 슬픔에 잠식되는 중반까지의 과정이 유쾌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작가의 전작 <연을 날리는 아이> 못지 않게 대중의 큰 반응을 얻어내며 영화화도 결정된 걸로 알고 있다. 중반부를 넘어서자 상당히 속도가 붙었다.


이 이야기가 주목 받는 것은

소재의 신선함이나 전쟁의 참상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성이 스스로 결정하고 개척해나갈 수 없도록 식물성을 강요하는 현실이 얼마나 잔인하며, 한편으로 동시대에 명백히 존재하고 있는지 전세계에 일깨웠기 때문일 것이다.


마리암은 성장도 결혼도 육아도 자신의 힘으로, 원하는대로 얻지 못했다. 혼외자식이기 때문이었고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팔려온 집에서, 아이마저 유산으로 잃은 뒤, 남편에게 폭행당하며 수십 년을 지낸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는 그녀는 자신이 아니라 둘째 부인을 지키기 위해 남편의 정수리 위에 삽날을 세우며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총살을 당한다. 결국, 자신의 죽음을 결정한 것만이 마리암의 유일한 자립이었다.

라일라는 마리암의 희생 덕분에 사랑과 자유를 얻게 되지만 짙은 그리움과 슬픔으로 마리암의 과거를 찾아간다. 그리고는 안정된 삶을 등지고 오로지 동등한 인간이 되기 위해 차별의 공간인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 결말이 주장하는 것은

여자는 여자일 때 행복한 것이 아니라, 여자도 인간일 때 행복하다는 아주 단순하고 당연한 사실이다. 남자가 남자이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듯이, 여자도 여자이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그것 때문에 불행해질 이유가 없다.

가난한 가정에 태어난 이에게도 행복할 권리와 기회가 충분히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지만, 그런 세상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안다. 그렇다고 해서 이상으로 나아가길 포기하라고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여성문제도 마찬가지다.


결코 여성에게 불리한 세상이 아니다

라는 반박은 꽤 조잡하게 들린다.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몇 가지 역차별 사례를 들며 일반화시키고 싶어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여성의 강력범죄 피해는 여전히 여타 선진국대비 월등히 높고, 급여 차이도 확연하며, 맞벌이 부부도 가사노동에 있어 균등하게 나누거나 여성이 도맡는 경우는 많아도 남성이 떠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국가적, 사회적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아직 성평등을 실현하지 못했다.


최근 알게 된 흥미롭고도 놀라운 부분은, 

여자들은 택시를 타고 카드 내는 걸 기피한다는 사실이다. 여자친구와 택시를 타고서 여자친구가 계산을 할 때의 모습을 관찰해보라. 카드를 낼 때 그렇게 안절부절할 수가 없다. 여자가 카드를 내면 안 되는 세상은 아니지만, 여자들은 카드를 내밀기 전 수십 번을 고민할 만한 위협적인 경험들을 해왔다. 남자와 여자의 다른 현실이 동시대에 명백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택시 기사님들이 억압의 가해자라는 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어떤 트라우마를 갖는 데 필요한 경험은 "매번"이 아니라 "몇 번"이라는 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몇 번"을 경험한 남자는 매우 드물다.


성평등이라는 것은, 

같은 노력을 들이거나 같은 행동을 했을 때 여자라는 이유로 다른 결과를 떠안지 않을 사회적 환경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공기, 라는 언어에서 별다른 감정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누구나 공평하게 마시며 살기 때문이다. 찬성하고 반대할 것이 없다. 성평등 내지는 페미니즘이라는 이 뜨거운 단어는 남녀가 모두 성별이라는 것 때문에 불평할 일 없이 공존하게 될 때 힘을 잃게 될 것이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없는 세상이 되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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