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보통하게. 보통을 행복하게.
유명 호텔 숙박이 취미이던 시절이 있었다.
호캉스라는 말도 없을 때부터였다. 그저 그런 내 삶을 조금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었다. GQ같은 매거진을 보던 스무 살 무렵부터 지금의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까지 10년 가까이 이어오던 여가 같은 것이었다.
나는 애정하는 몇몇 브랜드의 시계나 알려지지 않은 기발한 상품을 사는 것도 좋아했다. 돈이나 시간을 들여 경험을 쌓는 것도 좋아했다. 그게 여행이든 배움이든 이색적인 체험이든, 내 삶의 지평을 넓혀주고 칙칙한 일상을 채색해주는 활력소였다.
하지만 아내는 연애할 때부터 그것을 부담스러워했다. 선물보다는 편지를 맘 편히 좋아했고 어쩌다 요구하는 선물도 15만 원을 넘긴 적이 없다. 북새통을 이루는 도심보다는 한적한 골목을 거니는 걸 좋아했다. 쉑쉑 버거를 가느니 학교 뒷골목 떡볶이 집을 찾아다니고 한정판 양장본 소설 소장보다는 중고서점이나 도서관에서 구해다 읽는 게 좋다고 했다. 처음엔 이런 경험이 없어서 부담스러워하는 거겠지 했는데, 시간이 흘러도 아내의 이런 생활감은 나의 의욕에 물러서지도, 물들지도 않았다.
돈이 안 드니 반길 일이기도 할텐데,
나는 영 맥이 빠지고 섭섭한 마음이었다.
특별한 즐거움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데에서 오는 고독감도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화려한 것이라도 자신이 즐기지 않는 것에 돈과 시간이 드는 것을 거절할 줄 안다.
결국 나는 콜드플레이 내한 공연(!)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내한 공연(!!)도 혼자 봤고(콜프 공연은 심지어 공연 당일 아침에 아내가 표를 팔아 버리고 왔다), 극장에 내가 좋아하는 하는 영화가 걸리면 아내는 주말 데이트를 양보해가면서 나를 극장으로 떠밀거나 영화 마칠 시간에 맞춰 나와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손을 근질근질해가며 게임 타이틀을 살까 말까 망설이고 있자면
그거 오랫동안 할 수 있는 거야, 라든가
그거 하면 정말 재밌게 할 거 같아, 라며
다정하게 내 마음을 묻고는
그럼 사서 대신 재밌게 해야 돼, 라는 응원 아닌 응원을 해준다.
(빡세게, 열심히 하라는 잔소리는 하지 않으니 그것도 참 고맙다)
남편의 취향과 취미를 존중해주는 아내만 놓고 보면 행복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오예, 하면서도 복잡한 속내가 되는 건
행복해지는 데에도 정말 재능이 필요한 일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종종 들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아내의 재능을 6년이 넘도록
아주 가까이 보고 살 맞대고 지내면서도 쉽게 배우지 못한다.
나는 여전히 펀딩에 올라오는 신박한 아이템들을 지르고
미슐랭, 블루리본 받았다는 데에는 가격쯤 한 번 잊고서 지상의 맛이 아닌 그걸 경험해보고 싶다.
이색적인 장소, 체험이 있다고 하면 스크랩을 해 둔다.
나는 아내가 수전노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종량제 봉투를 푸지게 채우거나 물과 휴지를 독하게 아껴 쓰는 사람도 아니다. 검약 정신이 유난한 게 아니다.
아내가 비싼 행복들을 멀리할 수 있는 건,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을 분별할 줄 알고 일상을 충분히 즐길 줄 알기 때문이다.
아내에겐 5성급 전망이 없는 우리 월세집도
길거리에서 파는 2천5백 원짜리 떡볶이도
왓챠 평점과 흥행이 망한 영화도
휘둘리지 않고 속단하지 않고 비관하지 않는 힘이 있다.
시시한 걸로도 깔깔대고 즐길 수 있는 재능이 있다.
하나의 비싼 행복을 알게 되는 건
여러 개의 값싼 행복을 뒤로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행복은 가격을 알지 못하므로,
얼마가 들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소유하고 누리도록 부추길 것이고
그런 일들을 촘촘하게 채워 넣지 못하면
내 일상은 그만큼의 허전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전시회에 재미가 들려 길가의 벽화를 구질구질하게 여기거나
여름휴가로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면 시시하다고 느끼거나
수요미식회, 골목식당을 순례하느라 낡고 텅 빈 동네 밥집은 시도조차 해보지 않게 될지도 모르겠다.
예술의 기준을 까다롭게 세우고, 문화의 우열을 가리고, 좋고 나쁨을 빠르게 판단하게 될 수도 있다.
반복되고 뻔해 보이는 어느 오후도 행복하기 위해서는
싸구려 행복을 발견하는 재능이 필요하다.
특별한 곳에 있지 않아도, 특별한 놀거리, 맛거리 없이도
두런두런 하며 하루를 거뜬히 보낼 수 있는 건 쉽게 볼 능력이 아닌 것 같다.
장기하가 그랬다.
"니가 깜짝 놀랄 얘기를 들려주마.
절대로 믿고 싶지가 않을 거다.
나는 별 일 없이 산다.
나는 사는 게 재밌다.
하루 하루 즐거웁다.
매일 매일 신난다."
별 일 없는 삶도 신나게 살면서
당당히 외칠 수 있다는 건
정말 강인한 태도고 자세다.
집으로 가는 길에 뭐 좀 사갈까, 물으면
아내가 대답한다.
하계역 4번 출구 앞에 파는
붕어빵이 먹고 싶다고.
팥 말고 슈크림 든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