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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레터 Jul 17. 2024

12화 - 심플 플랜


다시 한번 당부하는데 동생 일에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아 줘. 그 의사, 괘씸하지만 이제 와서 동생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니까. 정확한 물증 없이 덤비다간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당해. 블로그 게시글 S양이 선정이라는 증거도 없고. 조용히 있는 게 부모님이나 죽은 선정이를 위한 일이야.



다음 날 방과 후까지 지훈이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 선정이 오빠 선민 선배에게 정황상 선정이가 사이버 모욕죄에 해당하는 테러를 당한 것 같다는 메시지를 자료와 함께 보냈다. 가족이 대처하고 내가 서포트 하는 게 가장 좋은 해결방법이란 판단이었다. 하지만 모든 의혹을 원천봉쇄하는 듯한 선민 선배의 답변은 장례식장에서처럼 간결하고 확고했다. 진짜 가족이 맞나? 챗봇 같은 답변이 되돌아오자 정이 뚝 떨어졌다. 그럴수록 완벽하게 고립된 시간을 견뎠을 선정이의 아픔이 붉고 선명한 통증으로 저릿하게 전해졌다. 외롭게 간 아이를, 나까지 외면할 수는 없다.     


손동호가 지금까지 만들어둔 덫에 이제는 딸 손지우가 걸려들게 한다면? 우리에겐 가장 이상적인 사건의 해결방법이고 손동호에겐 최악의 결말일 것이다. 중간고사 수학 문제 출제에 손동호와 골든티켓의 거래가 있었던 것을 밝혀내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지우에게 가장 큰 데미지를 안기는 방법이다. 공감 정신과 원장실에 비밀스런 자료가 숨겨져 있을까? 해킹한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계속 모니터링하다 보면 뭐든 단서를 찾을 수 있겠지만, 책 출간까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한참 동안 손동호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지훈이가 외쳤다.     


”이거다!! 배달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배달로 끝내면 됨! “     


갑자기 위대해 보이는 배달 라이더 지훈이의 계획은 정말 심플했다. 더구나 혹시라도 위기 상황이 생겨도 최대한 자연스럽게 빠져나올 수 있는 스토리 같았다. 손동호의 스마트폰을 확인한 결과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그에겐 일상의 루틴이 정해져 있었다. 출근길에 M 타워 1층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돌체라떼를 테이크 아웃하고, 낮 1시 오전 진료를 마치면 M 타워 부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밥을 먹으며 화양구 송리단길 <크림라벨 케이크> 집에서 배달 어플로 매일 같이 디저트를 주문하는 것이 그의 습관이다. 가끔 당근 케이크 같은 메뉴로 한눈을 팔 때도 있었지만, 그의 확고한 취향은 망고 청포도 케이크와 흑임자 라떼. 선정이를 코너로 몰아붙이는 게시글을 쓰면서도 달달한 디저트를 혼자 음미했을까? 그 달콤함이 이제 검은 화산재처럼 쓰디쓴 끝 맛이 되길!     


”크림라벨 가게 부근에서 대기 타다 손동호 주문 건 배차요청을 내가 받으면 끝이야. 은호 니가 공갈닥터 스마트폰 체크해서 케잌주문 들어가면 나에게 알려줘. “

”혹시라도 그 주문 건을 니가 접수 못 하면? “

”케이크 가게 앞에서 배달 맡은 라이더 만나서 배달료 두 배로 쏴주고 인터셉트하면 되지. 너랑 손발 잘 맞으면 꼬일 확률 없어. 내 라이더 인생 빅픽쳐는 톰크루즈 형님 같은 비밀요원이었구나. ㅎㅎ 내가 요령껏 원장실로 잠입해 볼게 “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왼쪽 보조개가 드러나게 활짝 웃는 지훈이. 배달 라이더 경력 10개월, 화양구는 물론 종로, 마포, 서대문의 골목골목이 이제 손금처럼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지훈이는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러나 녀석은 톰 형님처럼 퍼펙트한 요원이 아니다. 손동호를 응징해야 한다는 생각은 굳건하지만 혹시라도 우리 작전이 노출될 경우 지훈이는, 다쳐서는 안 된다. 자신의 라이더 플랜이 완벽하다며 조금 전까지 흥분하던 지훈이 역시 골똘히 뭔가 생각하는 모습이다.     


”여기서 더 나가는 건 리스크를 감당하겠단 의미야. 난 일찌감치 입시 던졌으니 상관없지만, 넌 고3이고 대학합격증 어머니 납골당에 가져다 드려야지. “     


우리의 작전에서 지훈이를 노출시키지 않으려면 공감 정신과 CCTV를 해킹해야 한다. 사이버보안 학과에 진학해 국가기관에서 일하는 최고의 보안전문가가 되고 싶은 내가 이런 일을 벌이는 게 과연 옳을까? 하지만 화이트 해커를 꿈꾸면서 죽은 친구가 겪은 사이버테러를 외면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컴퓨터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액자를 바라보았다. 액자 안에는 싱그러운 나뭇잎 배경에 캘리그라프로 엄마가 직접 작성한 문구가 쓰여 있다. <진실로 원하는 일을 하라>. 엄마를 떠나보내고, 중요한 순간마다 나를 이끌어준 문장. 생각보다 고요해진 나의 마음 안에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작전 개시일인 금요일, 책 출간은 이제 3일 남았다. 학교는 요사이 자주 발생하는 에어팟 도난사건 때문에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점심시간 벨이 울리자마자 나는 교무실로 담임 조끼 샘을 만나러 갔다. 수업시간마다 기본공식 몇 개 던져주고 학생들은 자습, 본인은 스마트폰 삼매경인 조끼샘은 뭐가 피곤한지 깊게 패인 눈 고랑에 학기 초보다 심해진 다크서클 조합이 꼭 저승사자 얼굴 같았다. 배탈이 난 것 같다는 나를 건성으로 쳐다본 후, 조끼샘은 쏘쿨하게 조퇴를 허했다. 나는 학교 후문 앞에 세워둔 자전거를 타고 M 타워 부근의 별빛공원을 향해 달렸다.      


별빛 공원 안, 울창한 나무 덕분에 CCTV 사각지대가 생긴 벤치를 베이스캠프로 삼고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펼쳤다. 지훈이는 이미 송리단길 크림라벨 케이크 가게 부근 놀이터에서 이어폰으로 나와 통화를 열어놓고 대기 중이다. 지난밤에 공감 정신과 CCTV 관리업체인 K텔레캅을 미리 해킹해 두었다. 대부분 영세업체인 국내 CCTV 관리 회사들은 보안에 취약하다. 네이밍만 그럴듯한 K텔레캅 역시 VPN 없이 관리자 페이지에 쉽게 접근 가능했다. 아이디, 비밀번호 프로그램을 무작위로 돌리자 5분 만에 관리자 페이지가 뚫렸다. 아직도 4자리 비밀번호를 사용하다니. 보안이 생명인 CCTV 관리의 블랙코미디 같은 현실이다. 지난밤 K텔레캅 홈피를 살피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는데 선정이 아버지가 운영하는 믿음 가정의학과는 오래전부터 이곳의 관리를 받았고 작년 8월부터 손동호도 이 업체와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공감 정신과 CCTV 화면을 열어 동향을 살폈다. 오후 1시 3분, 손동호가 점심 식사를 위해 병원을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병원에 남은 것은 안내데스크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며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간호사 한 명. 스마트폰 통화는 계속 열어두었지만, 지훈이와 나 둘 다 말이 없었다. 만약 오늘따라 그의 루틴이 깨진다면? 완벽하다 생각했던 우리의 플랜이 사실은 복안도 없이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에 갑자기 맥이 빠졌다. 그가 M 타워를 빠져나간 후로 시간은 정신없이 흐르는 것 같다가 또 한없이 제자리에 머무는 것처럼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된 느낌이다. 이렇게 마음이 허둥대던 1시 12분, 손동호가 평소처럼 스마트폰을 열고 케이크와 음료 주문을 넣었다.     


”나이스!! 주문 들어갔어! “     


나도 모르게 공원 벤치에서 주먹을 꽉 쥐고 소리를 질러댔다. 내가 실시간으로 주문 접수를 알리자 지훈이는 라이더 앱을 열어 해당 주문 건 배차요청을 받는 데 성공했다. 하늘이 위대한 라이더 지훈이 시나리오를 돕는 것인지, 그 이후로 모든 것이 술술 풀리는 듯했다. 지훈이가 M 타워 승강기에 탑승한 1시 32분, 같은 시간 간호사가 치약과 칫솔이 담긴 머그컵을 들고 일어서더니 병원을 빠져나갔다. 한순간 병원이 텅 비어버린 것이다. 이보다 더 절묘한 타이밍이 가능할까? 나는 이때부터 CCTV 레코딩 기능을 정지시켰다. CCTV 화면은 병원을 비추고 있지만, 저장 기능이 꺼져 나중에 확인하면 CCTV 오작동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재빠르게 병원으로 들어선 지훈이는 곧장 원장실로 가 배달 가방에서 케잌과 음료를 꺼내  손동호 책상에 올려두고 배달 인증 샷을 찍었다. 그리고 빠르게 손동호의 서랍을 차례로 열어보지만 별다른 것을 찾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찾는 수학 N제 단 한 장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지훈이의 잠입은 어설픈 해프닝으로 끝나게 되는 건가..     


”서랍 안에 별게 없어. 된장, 허탕인가 봐.. “   

  

어쩐지 모든 게 너무 술술 풀린다고 생각했다. 지훈이가 배달 가방을 챙겨 원장실을 나서려는 순간, 생각보다 먼저 나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마디.      


”지훈아, 책상 위에 있는 꽃병 좀 봐봐. “     


손동호 책상 위, 항상 빨간 장미 조화가 꽂혀 있는 초록색 꽃병. 꽃을 꺼내고 꽃병을 뒤집자 그 안에서 USB하나가 책상 위로 툭 떨어졌다. 지훈이가 USB를 젠더에 연결해 스마트폰에 꽂아 복사를 시작했다. 이를 닦으러 간 간호사가 곧 돌아올 것이다. 아니, 예상보다 빨리 식사를 마친 손동호가 돌아온다면? 지훈이 병원에 들어선 지 이제 3분이 지났을 뿐인데... 심장이 튀어나와 귀 옆에서 쿵쿵 뛰고 있는 것 같다. 그때 공감 정신과 자동문 밖으로 사람 그림자가 스쳤다. 그리고 스르륵 문이 열리고 있다!



* VPN(Virtual Private Network)- 암호화 기법을 이용하여 외부 인터넷을 내부망처럼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네트워크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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