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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레터 Oct 09. 2024

연재소설 24화 - 저는 성착취 동영상 피해자 입니다.

미스테리 연재 소설 - 텔레그램 성착취 범죄


“그러니까 동영상 업로드한 사람이 누구죠?”

“제가 했어요. 하지만 촬영 자체가 길성배의 협박 때문이에요.”

지선희 학생, 문제가 된 동영상 촬영도 셀프 모드로 한 거죠?”

“몇 번을 설명드려야 하죠. 놈들이 범죄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저를 압박해 동영상을 찍게 한 다음 미리 알려준 사이트로 업로드를 강요했어요.”

“동영상 업로드를 강요당했다는 현장 증거가 있나요?”     



꼼꼼한 선희가 ’신뢰관계인 동석‘을 신청해두어 함께 방문한 화양경찰서 3층 사이버 범죄 수사팀. 순조 줄 알았던 고소인 조사는 선희의 동영상 촬영과 업로드 시점부터 깊은 도랑에 빠진 바퀴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금테 안경에 긴 얼굴,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황준호 형사는 원칙에 입각한 조사의 중요성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카메라를 이용해 상대의 동의 없이 신체를 촬영한 후 유포, 협박, 전시하는 행위를 디지털 성범죄라고 하는데 선희의 경우 셀카 촬영 후 직접 사이트에 동영상을 업로드 했기 때문에 범죄 성립요건을 갖추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영진이 조직은 치밀하고 교활했다.     


“길성배와 강영진이 박제해버리라고 이야기하는 거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동영상 가지고 왔어요.”

“은호 학생, 박제가 동영상 유포를 의미한다고 확신할 수 있나? 디지털 성범죄에 해당하는 필요충분 요건이 성립되어야 하는데 이 사건은 억울하다는 지선희 학생의 주장과 정황만 있고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 악랄하게 빚 독촉한 거 캐봐야 지금 말한 피고소인들은 그냥 중개자이고, 텔레그램 암호화폐로 이자 보냈다면서? 이런 경우 실제 대출업자가 누군지 찾기가 쉽지 않아. 고소하면 본인도 불법 도박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텐데 아직 학생이니 원만하게 합의하고 실리 챙기는 게 나을 수도 있어.”

“그럴 생각이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습니다. 지난 8개월간 놈들 때문에 매일 지옥을 오갔어요. 이젠 발가벗겨진 채로 사거리에 서 있는 기분이구요.”

“그러니 하는 말이야. 동영상이 지선희 학생이 맞는지 비디오 판독 전에는 확인도 불가능해. 주변이 어두운 데다 마스크로 얼굴 다 가린 상태라 딱히 특정할 수도 없는데 긁어 부스럼이란 뜻이지. 아무도 몰라보는데 왜 문제 삼으려 하지? 게다가 평범한 여고생이 몸캠을 셀카로 직접 업로드한다? 협박 당했다 해도 맨정신에 그리 할 수가 있을까?”

“제가 없는 사실을 조작이라도 하고 있다는 말씀이세요?” 동영상 촬영을 계속 피해 다니니까 저의 딥페이크 영상을 만들어 지인들 연락처로 싹 다 뿌리겠다고 협박했어요. 도움 요청할 곳도 없고 궁지에 몰려 죽어버릴까 매일 생각했습니다. 이대로 쥐죽은 듯 있으면 앞으로도 지옥 같은 협박이 계속될 텐데 형사님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형사님, 선희는 방과 후 매일 화실과 물류센터에서 알바하면서 집안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착실한 후배입니다. 수개월간 계속된 폭언과 부당한 이자 갈취, 거기에 집요한 성 착취 동영상 요구까지... 이대로는 희망이 없으니 어렵게 용기를 내 도움을 청하는 겁니다. 억울함을 풀어주세요.”

“여하튼 흥분하지 말고.. 이 상태로는 미흡하니까 추가 자료 좀 더 찾아보고 만나기로 하지.”     


삼사일언(三思一言), 세 번 생각하고 한번 말하라. 사이버 범죄 수사팀 사무실 벽면에 걸려 있는 대형 액자 속 글귀는 대체 누구에게 하는 이야기일까? 열 번에 한 번이라도 민원인을 생각하고 말하는 것인지, 황준호 형사의 삐딱한 시선과 말투에 선희는 분통이 터져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고소장이 기각되는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해야 할까? 단체 고소의 판을 짜보려 했는데 동호는 놈들을 고소하면 자신도 불법 도박의 꼬리표가 남는다며 발을 뺐다. 휴학한 정태경은 전화번호를 바꾸고 이사를 간 것인지, 아예 동네에서 사라졌다는 소문이 돌았고 선정이네 집 역시 모든 것을 묻기를 원했다. 선희의 외로운 싸움을 어떻게 도와야 할까?          





“그러니까 지난 2월에 선정이가 편의점에 와서 편지를 주고 간 후에 계속해서 그 사건을 파고 있었던 거야? 공부하느라 얼굴이 상한 줄 알았더니 고3이 지금 제정신이냐?”

“죄송합니다...”

“아버님, 저도 지켜봤는데 그게.. 상황이 꼬이다 보니 은호가 개입할 수밖에 없었어요”    


투게더 편의점이 자리한 골목에 인적이 드물어진 깊은 밤. 아버지, 지훈이와 함께 파라솔에 둘러앉아 지훈이가 만들어 온 숯불 닭꼬치를 한입 드시고 아버지가 기분이 좋아지셨을 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꺼냈다. 경찰서에 다녀온 후 며칠을 고민하다 아버지의 후배인 연합뉴스의 김화식 기자님께 무작정 메일을 보낸 터라 아버지의 도움이 절실했다.      


“물러터진 은호는 그렇다 쳐도 믿었던 지훈이 너까지 감쪽같이 아빠를 속이고 있었던 거냐??”
 “....죄송합니다. 아버님.”     


윤기가 줄줄 흐르는, 통통한 닭고기살 5개가 주르륵 꽂혀 있는 닭꼬치를 아버지는 한입에 전부 털어 넣고는 맥주 한 캔을 따서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지훈이와 나를 번갈아 보시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ㅎㅎㅎ 너희들이 손동호 그 인간을 보내버렸단 말이지? 우리 은호 맘고생 한거 생각하니 4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네. 닭꼬치가 세상 꿀맛이다. 잘했어. 아주 잘했어 ㅎㅎ”

“그쵸? ㅎㅎ 그러니 김화식 기자님 선희랑 한 번만 만날 수 있게 연결 좀 해주세요.”

“잘 모르지만 화식이가 관심 가질 거 같다. N번 방 사건 때 ’추적단 불꽃‘이란 이름으로 여대생 두 명이 그 사건을 취재해 최초로 알리기 시작했는데 화식이가 그때 관심을 가지고 여대생들이랑 협업했거든. 세상이 각박해도 남의 어려움 그냥 지나치지 않는 너희들이 참 대견하다. 선정이처럼 안타까운 일 또 생기지 않게 도와야지.”     


김화식 기자님은 아버지 연락이 아니어도 내 메일을 받고 회신할 생각이었다면서 토요일 저녁 미팅을 제안했다. 좋은 소식을 선희에게 알리려던 목요일 밤, 선희는 경찰에 추가로 제출할 자료를 찾는 대신 자신의 SNS 계정 <달려라 써니>에 생각지도 못한 핵 펀치를 날렸다.       



    

이 그림은 제가 좋아하는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그림입니다. 성경 다니엘서 13장의 이야기를 담은 것으로 두 장로가 목욕 중인 수산나를 성폭행하기 위해 겁박하는 장면입니다. 이 그림은 바로 젠틸레스키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친구 타시에게 성폭행당한 피해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612년, 로마 법정은 당시 19살이던 그녀의 순결을 입증하기 위해 타시와 대질 상태에서 '시빌레'라는 모진 고문을 가했습니다. ‘시빌레‘는 두 손을 가슴에 묶은 채 손가락 마디가 으스러질 때까지 끈으로 조이는 고문으로, 모진 고통 속에도 증언을 번복하지 않아야 피해자의 진술을 진실로 인정했습니다. 상대의 죄를 입증하기 위해 모진 고문을 견딘 젠틸레스키의 심정으로 지금 이 글을 씁니다.

<<저는 성 착취물 동영상의 피해자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접한 사이버 도박으로 인해 교내에서 음성적으로 활동 중인 도박총판 조직에게 대출 백만 원을 받았습니다. 열흘 만에 원금의 100%까지 치솟는 살인적인 이자율 때문에 그동안 몸이 부서져라 일해 600만 원 이상을 갚았지만, 여전히 빚 400만 원이 남아있습니다. 왜 미련하게 도박을 했느냐 탓한다면 저의 어리석음 때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한순간의 잘못으로 제 인생 모든 것을 잃어야 할까요? 기초생활 보장 수급자 가정에서 알콜 중독인 아버지와 단둘이 살면서 중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쉰 적이 없습니다. 다행히 제가 일하는 화실 원장님이 청소와 뒷정리를 돕는 대가로 수업을 무료 수강할 수 있게 배려해 주셔서 어려운 형편에도 화가의 꿈을 키워왔습니다. 그러나 힘들게 지켜온 저의 삶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총판 조직은 이자가 제때 입금되지 않으면 저의 딥페이크 나체 영상을 만들어 지인에게 뿌리겠다고 협박하면서, 차라리 자기들이 요구하는 동영상을 찍으면 텔레그램 비밀방에만 공유되니 오히려 안전하고 빚도 탕감해주겠다고 지속적으로 회유했습니다. 출구 없는 함정에 빠져 수차례 자살까지도 생각도 해봤지만, 스스로가 불쌍하고 억울했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해서는 안 될 모든 폭력 앞에 우리는 모두 분노합니다. 그런데 왜 ’성폭력, 성범죄‘만은 다를까요? 오히려 피해자가 숨죽이며 세상에 알려질까 불안해하는 현실. N번 방 사건 이후에도 더욱 진화한 범죄가 되풀이되고 있는데도, 우리 사회는 피해자만을 죄의식과 자책의 심판대로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성‘이란 단어를 빼고 생각해 주세요. 저는 명백히 그들에게 범죄와 폭력을 당했고, 법과 정의가 작동하리라 믿는 이 사회에 더 이상 숨지 않고 구조를 요청합니다.     


젠틸레스키가 법정에 선 후 무려 400년이 더 지났지만 세상에 자신의 치욕을 드러내놓고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성범죄 피해 여성의 고통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시빌레‘의 고문을 이기고 타시의 유죄를 입증한 젠틸레스키처럼 저도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학교를 고리대금업과 마약유통의 무대로 전락시킨 범죄조직의 실체를 밝히고, 지난 2월 같은 피해를 당하고 세상을 떠난 학교 선배와 저의 억울함을 모두 풀어주세요.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선희가 당차고 총명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용감한 아이인 줄은 몰랐다. 선희의 게시물은 한마디로 SNS를 폭파 시켰다. 밤새 수십만 건의 공감과 리트윗, 댓글이 이어졌다.     


-와! 사이다 글. 폭력과 범죄 앞에 왜 피해자가 숨어야 하나.

-써니 님, 진심 응원합니다. 꼭 지켜드릴게요!!

-이게 맞지. 쥐새끼 같은 놈들 완전 쫄았겠다.

-400년 전 <시빌레의 고문>이 여전히 진행형인 끔찍한 대한민국...경찰은 도대체 어디에?!

-N번 방 핵심 운영자 켈리가 받은 처벌 고작 징역 1년!! N번 방 범죄자들 절반이 평균 300만 원 벌금 내고 끝! 현실 인식 없는 판사들 때문에 유사 범죄 무한 생성 중이다.

-써니 님 학교에 피해자가 더 있다니! 게다가 세상을 떠났다니 완전 소름이다.

-사건 해결될 때까지 끝까지 함께 갑니다! 써니 님의 용기 있는 행동이 악을 몰아내는 한걸음이 되길 바래요!     



금요일 새벽 6시, 김화식 기자님은 선희와 오늘 당장 인터뷰가 가능한지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리고 잠시 후 영진이와 성배가 실내체육관 대기실에 설치해둔 카메라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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